속지 않기 1983. 7. 12.
출가 이십오 년에 정신적인 깊이와 아름다움의 세계를 계발하는 데 성공적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명無明 업장業障 탓이리라.
무명이란 사실을 바로 보지 못하는 미혹이며, 미혹이란 욕망에 끌려 자신의 눈을 가려 버림을 말한다. 스스로 속아 사는 것을 왈 미혹이라, 무명이라 이름한다는 것이다.
오늘 같음이 매일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
그것이 아마 속는 일일 것이다.
오늘 같은 맑은 날씨, 푸른 하늘, 부드러운 바람, 쏟아지는 햇살 그리고 그 속에서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이 자유로움이,
이 행복이,
이 생동감이 늘 있는 것으로,
적어도 쉽게 사라져 영영 다시 못 볼 물거품 같은 것으로는 느껴지지 않는 것. 아마 이런 막연한 믿음 속에서 마음 놓음이 속는 일일 것이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마 속음이겠지.
이 사람과 다투고 저 사람과 웃고, 이 일을 걱정하고 저 일에 매달리고, 붉다고 느끼고 희다고 느끼고, 이런 분별 저런 지식, 우리의 감관에 의한 모든 인식과 행위가 어쩌면 또한 모두 속임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은가?
이 가운데 사라지지 않고 소멸하지 않는 무엇이 있단 말인가?
속이지 않는 어떤 경계가 있다는 것인가?
꿈속같이 사라져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찾아볼 길 없는 것,
바로 아까까지 분명하던 것이
한순간에 소멸하여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 것,
그렇게 그대를 배반하고
그렇게 그대를 속이는 것들에게
계속 마음을 빼앗겨 있어도 괜찮은 것일까?
후유,
큰 숨 한 번 들이키고
정신 차리자.
시심마是甚麽 심마甚麽오?
- 수좌 적명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