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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수행자의 고뇌

수행자의 고뇌                     1982. 3. 17.

  

 

근래 가끔 절망적인 공허감 속에 깊이 빠져들 때가 있다. 이 공허는 곧 무력감이기도 하거니와, 이런 감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지 나는 별로 살피지 못했었던 듯하다. 

 

좀 더 젊은 시절에도 가끔 어쩔 수 없는 좌절감 속에서 괴로워한 일은 있었지만 그것은 잠깐이었고 깊이도 대단한 것이 아니어서 맑은 날씨에도 구름은 가끔 해를 가리기도 하는 것이라 여기고 흘려 지내 버렸었다.

 

사십 대에 들어서면서 좌절감은 그 횟수나 깊이에서 무시 못 할 양으로 늘었고, 어쩌면 늘 쫓기고, 자신 없고, 암담한 기분 속에 살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벌써 나는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그 원인을 찾아보도록 애써 봤어야 옳은데 이제까지 끌었다. 과연 둔하다.

 

나는 괴로워한다.

 

우선 그 내용은 뭘까? 공부가 진전이 없기 때문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현실의 나의 생활과 바라는 바의 이상과 차이가 멀기 때문이기도 했다. 

 

인격적인 면에서도 너무 미흡하고 정서적으로도 매우 불안하다. 의지력도 부족하고, 판단력도, 주의력도 모자라다. 건강도 점차 나빠진다. 

 

이런 모두를 극복하려면 공부가 잘되어야 하는데 뜻대로 안 된다. 그러니 만사 잘되기는 글렀고 그러니 괴롭다.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출가 이후 이십몇 년 동안 아직 한 번도 출가를 후회해 본 일이 없고 해탈법을 의심해 본 일도 없다고 확신해 왔다. 

 

세간법 알기를 물거품같이, 티끌같이 여겼다. 한마디로 우습게 알며 지내 왔다. 그렇게 출가 사문으로서 출세간의 뜻이 분명히 서 있는 자신으로 알아 왔다.

 

그런데 어제저녁 포행하며 자신의 괴로움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결코 그렇지 못함을 깨닫고 새삼 놀랐다. 

 

물론 전에도 자신의 욕정이 끊임없음도 알았고 명리심名利心이 들끓음도 알았지만, 자신이 나아가는 길에 대해 대단한 신념과 의욕과 정열을 함께 간직하고 있음을 의심해 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문득 돌이켜 보니 의외로 세욕이 내 안에 주류를 이루고 있고, 구도의 마음은 먼지 같고 새털 같고 가벼운 연기와 같았다.

 

생각해 보니 내 마음은 세욕으로 가득 찬 캄캄한 동굴이었고 번뇌로 들끓는 열탕이었다. 

 

갑갑하지 않고 괴롭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무력하고, 용기 없고, 허탈한 게 당연하다. 

 

이런 세욕에 매여 있으니 어느 틈에 진정 공부 생각이 나며, 공부 생각이 진실치 않으니 수행인의 맑고, 깨끗하고, 활기찬 심정을 어떻게 간직하겠는가? 

 

차고 맑은 수도인의 자세가 없으니 당연히 흐릿하고 텁텁한 가운데 욕정에 이끌리고 명리에 휘둘리게 되며 온갖 괴로움이 침노侵擄할 수밖에 없다.

 

그래, 전혀 없는 듯싶어도 언제나 세욕이 마음 밑바닥에 깔려 있고 이놈이 고개를 들면 괴로움이 따라서 일어난다. 

 

어떤 괴로움도 애욕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을진대 수행인에게 가벼운 번민이 있다면 가벼운 욕망의 침노요, 무거운 고뇌라면 무거운 세욕의 침노일 뿐이다.

 

명리의 마음은 왜 일어날까?

 

그 부실함을, 그 허망함을 꿰뚫어 보지 못함 탓이다.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 진정한 평화는 외적外的인 것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우리에 있어 실로 그 어떤 것도 현재의 이 주체적 자아(자아라고 했을 때 진정 자아는 벌써 그 자리를 천 리나 벗어났지만) 말고는 모두 이 외적인 것이고, 믿을 수 없는 것이며, 

 

허구이고, 허상이다. 어떤 것도 의지할 수 없고 확고한 것이 아니다.

 

사람도, 사람의 칭찬이나 존경도, 그 의지도, 사랑도 결코 우리를 평안하게는 못 한다. 

 

불안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밖에서 오는 듯싶지만 실은 내적인 자기 욕망이 그 원인이다. 

 

욕망은 밖을 향한 마음이고, 내 마음의 흔들림이며, 나 자신의 갈등이다. 

 

불안은 곧 자신에서 비롯되며 자기의 일이다. 따라서 평안도 자신에서 비롯되고 자기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수좌는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너무도 부처님 말씀과 같거늘…. 

이런 상식을 상식으로 지닐 수 없다면 그는 지극히 비정상이라는 얘기다. 이런 비정상인 데서 명리심도 일어나고 고뇌도 따라서 생긴다. 이제 정상일 필요가 있다.

 

그래, 역시 세상사는 티끌이고, 물거품이고, 한갓 깃털인 것이다.

 

후련한 마음으로 살자.

 

수좌에게 고뇌라니 차라리 거북 털, 토끼 뿔을 찾지!

 



  세욕이 허망임을 가끔 살피며 살자.

 

  밖으로 치구하는 마음이 적어지면

 

  어지러운 상념도 쉬게 되고

 

  조용히 이 한 가지 일에 관심을 기울이면

 

  거기에 모르는 정열도 고인다.

 

  

 

  그래,

 

  고요함 속에 아무 동기 없는

 

  순수한 정열이 있음을 나는 안다.

 

  그 순수한 정열만이

 

  더욱 자신을 순수한 데로, 깊은 데로 이끌며

 

  모든 무기력과 공포와 불안을 제거해 줄 수도 

  있게 된다.

 

  

 

  고요함 속에 안주하고

 

  순수한 정열을 타고 참구해 들어가는 것,

 

  그것이 나의 유일한 길이다.

 

  내가 아는 소로小路 말이다.

 

 

     - 수좌 적명 중에서 -



           

        적 명 寂 明(1939~2019)

 

        제주에서 태어나다. 세수 81세, 법랍은 

        60세. 활구참선活句參禪에 매진한 반백 

        년 넘는 세월에 늘 청빈한 모습으로 후학  

        에게 수행자의 본분을 보였다. 불이不二 

        에 대한 수행은 만 갈래 청산에 오롯이 

        배었고, 옷자락을 들춰 펴낸 자비심은 뭇 

        수행자와 불자들을 고루 안았다. 화두話

        頭의 불꽃이 숯불처럼 뜨거웠던 큰스님의 

        가슴속엔 그지없이 평온한 반야경般若

        經이 환히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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