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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욕망과 두려움은

 

현장 번역


보리살타菩提薩唾

의반야파라밀다고 依般若波羅蜜多故

심무가애心無圭碍 무가애고無圭碍故

무유공포無有恐怖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

구경열반究竟涅槃


조계종단 표준의례 한글 반야심경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시,심경


그대는

그대의 마음이라는 필름을 통하여

 

그대 자신 위에

그대의 사적인 감정과 관념이 지배하는 세계를 창조하고

 

그 안에 그대를 가두어 놓고 있으므로

몸이라는 형상과

마음이라는 이름으로

 

이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내가 있다는

거친 환상에서 깨어날 수 있다면

욕망과 두려움은

침묵의 빛으로 산산히 부서지고

 

영원한 자유와 행복이라는 씨줄과 날줄이

그 자리에 그대의 얼굴을 그리는 것이다.


*

 

심경은 그 형식에 관계없이 시공을 초월한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붓다의 말씀이다

 

설법의 대상으로서의 사리자가 심경 안에 존재하고 있지만 그것은 심경 이라는 무대 위에서의 연출일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붓다께서 우리 모두를 부르는 상황을 떠올리게 하기 위하여

 

‘그대여’ 또는 ‘그대’라는 표현을 시의 행간에 담아 놓았다

 

세계 안에서는 자유와 행복을 찾을 수 없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가치가 독재하고 있는 세계 그 자체가 무지와 혼돈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욕망에 의하여 발생한 문제들은 내가

그 욕망으로부터 해방이 되어야 비로소 풀린다.

 

그러므로 자유와 행복를 원한다면

나의 내면을 탐색해야 한다.

 

그리고 내면을 탐색한다는 것은

몸을 나와 동일시하는 관념

즉 나의 허구성을 사유하는 일이다.


몸이라는 형상과 마음이라는 이름으로서의 내가 실재하고 있다는 환幻을 두려움없이 마주볼 수 있다면

 

나는 세계가 그 안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순수한 의식의 바다 이며

 

절대적 존재 그 자체라는

진실이 절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나는 창조주이며 피조물이고 경험자이면서 경험이며 몸이면서 몸에 깃드는 자라는

 

이 경천동지할 말씀을 읽거나 생각할 때마다 나의 가슴에는 눈물이 고인다.

2500년 전의 붓다께서 밀레니움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을 찾아와

 

“그대가 이 세상 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이다.

단지 그대가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라고 말하며 우리의 축처진 어깨를 다독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심경은 지금 우리들에게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현장의 심경을 번역한 조계종단의 표준의례 한글 반야심경에서는

 

“보리살타菩提薩唾

의반야파라밀다고 依般若波羅蜜多故”를,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라고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반야는 반야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의지하므로’라고 번역하는 것은 어쩌면 심경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 도 있다.

진정한 앎이란 앎과 하나되는 일이고 반야의 완성은 반야와 하나가 되는 일이다.

 

앎이란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To know is to be such).

 

앎과 삶이 서로 다르다면 그것을 앎이라 할 수 없으며 반야 역시 반야로서 존재해야 비로소 반야일 수 있는 것이다.

 

반야 즉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지혜는 수행자가 공부하거나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내가 바로 지혜 그 자체라는 것을 자각하는 일이다.


지혜라는 것이 본래 없으므로

지혜란 얻을 수 있거나 잃어버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심경이 말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대상에게 실재성을 부여하는 것이

순수한 의식으로서의 나이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을 가진 한 인격이라는 것은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에 의존한다.

 

과거를 현재와 동일시하면서

그것을 미래에 연결시킴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인격을 인식하는 의식은

그 인격 이전에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인식의 주체는 인식의 대상보다 앞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의지와 아무런 관계없이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져야 하는 몸과 마음이 아니라

 

그 몸과 마음을 인식하는 의식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나는 의반야파라밀다고依般若波羅蜜多故를

 

“몸이라는 형상과 마음이라는 이름으로

이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내가 실재한다는 거친 환상에서 깨어날 수 있다면”이라고 바꾸어 표현하였다.

반야는 자신의 에고에서 비롯되는 모든 욕망과 두려움을 내려놓고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나를 비운다는 것은 욕망이나 두려움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몸과 마음을 나라고 생각하는 관념을 사라지게 하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깨우침이란 깨우침이 어떤 사람을 통하여 구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깨우친 사람이라는 배역만 있는 것이며

실제로

깨우침을 체득한 독립되고 자율적인 사람이란 없다는 뜻이다.

 

깨우침이란 깨우침과 하나 되는 일인 것이다.

 

한글 반야심경에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라고 번역되어 있는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은

 

“욕망과 두려움은 침묵의 빛으로 산산히 부서지고”라고 바꾸어 표현했다.

 

나를 사라지게 하면 헛된 생각이나 욕망과 두려움도 함께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경열반究竟涅槃은,

“ 영원한 자유와 행복이라는 씨줄과 날줄이 그 자리에 그대의 얼굴을 그리는 것이다.”라고 의역했다.

 

영원한 자유와 행복은 구경열반 究竟涅槃의 다른 이름이요 얼굴이라는 점을 나타낸 것이다.

금강경이 무아를

심경은 공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경이라고 사람들이 말하지만

 

심경과 금강경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공과 무아는 그 이름만 다를 뿐 같은 것이다.

 

시詩,반야심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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