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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불생불멸

 

 

현장 번역본

 

사리자舍利子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

 

 

조계종단 한글의례 반야심경

 

사리자여!

모든 법은 공하여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

 

 

시, 심경

 

그대여!

의식이라는 실에 매달려 있는 이 세계에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을 아무런 두려움 없이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의 이름과 형상으로

그대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그대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으므로

 

몸과 마음이

그대의 실체라는 믿음은

오솔길 위에 떨어진 밧줄을 뱀으로 인식하는 것과

같은 착각일 뿐이며,

 

나는

나를 알지 못하는

순수한 의식의 바다로서

 

그 위에서

세계가 파도처럼 일어났다가 사라지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내 안에 있고

모든 것이 나이면서 나의 것이며

 

모든 것의 시작의 앞에 그리고 끝의 뒤에 내가 있는 것이다.

 

심경은 공을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한 것이라고 말했다.

 

모든 것의 근원으로서의 공은 이름과 형상을 가지고 있는 물리적 대상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름과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반드시 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영원히 존재하려면 이름이나 형상이 부재해야 한다.

 

불생불멸은

 

공의 영원성을 그리고 불구부정과 부증불감은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그것의 털끝 하나도 건드릴 수 없는 공의 절대적인 독립성을 상징하고 있다.

 

몸으로 태어나기 전의 나는 없이 있음이며 이것이 드러난 것이 순수한 의식이라고 인도 뭄바이의 붓다 마하라지가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안에서는 공의 그림자나 향기같은 것을 찿아볼 수는 없는 것인가?

 

“내가 있다”라는 현존의식이 바로 공의 그림 자이다.

 

 

존재의 존재성으로서의 공이 물질의 표면 위에서 굴절된 빛이 순수한 의식으로서의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몸과 마음이 아니라

 

”내가 있다”라는 의식의 바다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고 마하라지는 말한다.

 

내가 순수한 의식이라는 것을 자각하면서 그 안에 머무르는 것이 수행이다.

 

“내가 있다”와 “신이 있다”라는 말씀이 우리의 마음 안에서 구분이 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단계에서는,

“내가 있다.”라는 의식조차 넘어서야 한다고 마하라지는 말하고 있다.

 

“내가 있다”라는 현존의식도 결국

몸에 의지 하는 관념이며 주체와 객체라는 이원성에 걸려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공사상을 바탕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다석 유영모 선생은

이원성을 넘어선 절대성을 “없이 있음”이라고 표현했다.

 

공을 하나님으로 해석한 것이다.

 

상대가 끊어진 절대이므로 우리가 인식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며 스스로 있는 존재라면 신일 수 밖에 없고 신은 전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몸이 죽게 되면 

“내가 있다”라는 현존의식도 같이 사라진다.

 

연못에 비친 달은 실재하는 달이 아니라 하늘 위에 떠있는 달의 그림자인 것이다.

 

그러나 생명과 의식으로서 그리고 존재 그 자체로서의 나는 남는다.

 

공이라 해도 완전하지 않다.

 

왜냐하면 ‘비어있음’은 ‘충만함’이라는 단어와 함께 이원성 이라는 바탕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 이다.

 

무라고 해도 완전하지 않다.

 

무라는 말이 유 라는 단어와 함께 상대성이라는 그물에 같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공과 무아 또는 “없이 있음”이라는 단어가 상징하고 있는 것은

상대성을 넘어서는 절대성이다.

 

절대성을 체험하고자 한다면 절대성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내가 바로 절대성 그 자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을 바로 보면 모든 존재의 성품을 볼 수 있다는 말씀이 그것이다.

 

절대성에 대하여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은 깨우친 사람이지만

깨우친 사람은 깨우침 에 대하여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는 깨우침이 자신을 통하여 드러난 것일 뿐이며

자신을 깨우친 사람이라고 이야기 하지도 않을 것이다.

 

대신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절대성을 상대적인 언어로 묘사하거나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말을 하기보다는 침묵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는 말을 무심히 듣는 ‘들음’으로 존재할 것이다.

 

그는 ‘없이 있음’이요 ‘무無자기의식적인 앎’이기 때문 이다.

 

마하라지는 말한다.

개체로서의 나를 넘어서면

 

“나는 모든 것이다”가 옵니다.

“나는 모든 것이다”를 다시 넘어서면

순수한 의식으로서의 “내가 있다”가 옵니다.

이 “내가 있다”를 또 다시 넘어서면

 

그대는 실재하는 공의 절대성과 하나가 되는

 

“없이 있음”입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하며

불구부정不垢不淨하고

부증불감不增不減하다는 것은

 

결국 공과 무아의 얼굴을 그리는 말이다.

 

  시詩,반야심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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