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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참마음엔 망혹이 없다

 

[학인] 참마음이 망(妄) 가운데 있는 것이라면

이는 곧 범부이거늘, 어떻게 해야 망(妄)에서 벗어나 성인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보조] 옛사람이 말하기를 “허망한 마음이 없는 곳이

곧 보리요, 생사와 열반이 원래 평등하다” 하였으며,

 

경에 말씀하시기를

“중생의 허환(虛幻)한 몸이 멸하는 까닭에 허환한 마음도 멸하고,

 

허환한 마음이 멸하는 까닭에 허환한 티끌도 멸하고,

허환한 티끌이 멸하는 까닭에 허환함이 멸한다는 것도 멸하고,

 

허환함이 멸한다는 것이 멸하는 까닭에

허환치 않은 것은 멸하지 않나니,

 

비유하건대 거울(옛날의 쇠거울)을 갈 때에

녹[垢]이 다하면 광명이 나타나는 것 같다” 하셨으며,

 

영가(永嘉)가 또 말하기를, “마음은 뿌리요 법은 곧 티끌이니, 두 가지는 마치 거울 위의 먼지와 같다.

 

먼지와 때가 다 할 때에 광명은 비로소 나타나고, 마음과 법을 모두 잊을 때에 성품은 곧 참되어진다” 하니,

 

이것이 곧 망을 벗어나서 참을 이루는 모습이니라.

 

[학인] 장생(莊子: 장자)이 말하기를

“마음이란 그 뜨거움이 불도 태우고, 그 차가움이 얼음을 얼리며,

 

빠르기가 구부렸다 펴는 사이에 사해(四海)의 밖을 두 차례나 더듬고, 멈춤은 깊고도 고요하고, 움직임이 멀고도 높은 것은 사람의 마음뿐이로다” 하였으니

 

이는 장생이 먼저 범부의 마음은 이처럼 다스리기 어려움을 말한 것인데, 종문(宗門: 선문)에서는 어떤 법으로 망심(妄心)을 다스립니까?

 

[보조] 무심(無心)의 법으로 망심을 다스리느니라.

[학인] 사람이 무심하게 되면 초목과 같이 될 것이니, 무심이란 말씀에 대하여 방편을 베풀어 설명해 주소서.

 

[보조] 지금 말한 무심이라 한 것은 마음의 본체가 없다고 하는 무심이 아니라,

다만 마음 가운데 물(物)이 없음을 이름하여 무심이라 한 것이니라.

 

마치 빈 병[空甁]을 말할 때, 병 속에 물건 없는 것을 빈 병이라 하고, 병 자체가 없는 것을 빈 병이라 하지 않는 것 같으니라.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다만 마음에 일이 없고, 일에 마음이 없으면 자연히 텅 비어 신령스럽고 고요하여 묘하리라” 하시니,

 

이것이 마음의 참뜻이니라. 이에 의하건대, 망심이 없다는 것이지 참마음의 묘한 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니라.

 

 

첫째는 깨달아 살핌[覺察]이니,

즉 공부할 때에 항상 잡념을 끊어서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니라.

 

한 생각이 생기기만 하면 당장 깨달아 깨뜨려야 하나니,

허망한 생각을 깨달아 깨뜨리면 뒷생각이 나지 않으리라.

 

이 깨닫는 지혜도 쓰지 말지니,

허망함과 깨달음을 모두 잊는 것을 무심이라 하느니라.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 말고 오직 깨달음이 늦을까를 걱정하라” 하였으며,

 

또 게송으로 말씀 하시기를,

“참[眞]을 구하려 하지 말고 오직 소견을 쉬도록 해라” 하셨으니,

 

이것이 허망을 쉬는 공부니라.

 

둘째는 쉼[休歇]이니,

즉 공부할 때에 선도 악도 생각하지 않고, 마음이 일어나면 곧 놓으며[休]

반연[緣]을 만나거든 역시 쉬는[歇] 것이니라.

 

옛사람이 말하기를 “한 가닥 베[布]를 희게 다듬듯, 싸늘하여 가을비 내리듯, 옛날 사당[古廟] 안의 향로같이 하라” 하였으니,

 

고운 먼지까지 끊고 분별을 떠나 바보 같고 천치 같이 되어야 바야흐로 조그만치 마주치게 되느니라.

 

이것이 망심(妄心)을 쉬는 공부니라.

 

 

셋째는 마음을 없애고 경계를 남기는[泯心存境] 공부니,

 

즉 공부할 때 온갖 망념을 모두 쉬어 바깥 경계를 돌아보지 않고 다만 자기의 마음만을 쉬는 것이니라.

 

허망한 생각이 이미 쉬었으면 경계가 남아 있은들 무슨 방해로움이 있으리요?

 

이는 곧 옛 어른의 말씀에

“사람은 빼앗고 경계는 빼앗지 않는다”는 법문이니라.

 

그러므로 누군가가 말하기를, “여기에 꽃다운 풀밭이 있으되 다정한 친구 하나도 없다” 하셨고,

 

또 방공(龐公: 방 거사)이 말하기를, “다만 만물에 대하여 무심하기만 한다면 만물이 항상 둘러싸여 있은들 무슨 방해 있으리요?”

하였으니,

 

이것이 마음을 없애고 경계를 남기어 망을 쉬는 공부니라.

 

넷째는 경계를 잊고 마음을 남기는[泯境存心] 공부니,

 

즉 공부할 때 안팎의 경계를 모두가 공적하다 하고 오직 한마음만을 남겨서 외로이 우뚝 세우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옛 사람이 말하기를,

“만법(萬法)과 더불어 짝되지 말고

모든 경계와 상대되지 말라.

 

마음이 경계에 집착하면 마음이 허망하겠지만

이제 경계가 없거니 무슨 허망함이 있으리요?” 하니,

 

참마음이 홀로 비추어서도 도에 걸리지 않는 것이라.

 

이는 곧 옛사람이 말하기를, “경계를 빼앗고 사람은 빼앗지 않는다” 한 것이니라.

그러므로 어떤 이가 말하기를,

“좋은 동산에 꽃은 이미 졌건만 수레와 말은 여전히 붐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삼천 명의 검객(劍客)은 지금 어디에 있는고? 장주(莊周)가 태평세계 이룰 것만 홀로 계교하도다” 하니,

 

이것이 경계를 잊고 마음을 남기는[泯境存心] 마음 쉬는 공부니라.

 

 

다섯째는 마음과 경계를 모두 잊는[泯心泯境] 공부니,

 

즉 공부할 때 먼저 바깥 경계를 비우고 다음에 안으로 마음을 멸하는 것이니라.

 

이미 안팎으로 마음과 경계가 모두 고요해졌거늘 끝내 허망이 어디서 생기리요?

 

그러므로 관계(灌溪)가 말하기를,

“방에 벽(壁)이 없고 사방에 문(門)도 없어 벌거벗은 듯, 맑아 씻은 듯하다” 하였으니,

 

이는 조사들이 말한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는다’는 법문이다.

 

그러므로 누가 말하기를,

“구름이 흩어지고 물은 흘러가니, 고요하여 천지가 비었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사람과 소를 모두 볼 수 없으니 바야흐로 달 밝을 때라” 하니,

 

이는 마음과 경계를 모두 잊어 허망을 쉬는 공부니라.

 

여섯째는 마음과 경계를 모두 남기는[存心存境] 공부니,

 

즉 공부할 때에 마음이 마음의 지위에 머무르고 경계가 경계의 지위에 머물러서 때로는 마음과 경계가 마주쳐도 마음이 경계를 취하지 않으며,

 

경계가 마음을 따르지 않아 제각기 서로 어울리지 않으면 자연히 망념이 생기지 않고 도에 걸림이 없으리라.

 

경에 말씀하시기를,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물러서 세간의 모습이 항상 머문다” 하시니

이는 곧 조사께서 말하기를,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다’한 법문이니라.

 

그러므로 어떤 이가 말하기를,

“한 조각의 달이 바다 위에 떠오르니

몇 사람이나 누대 위로 오르던가?” 하였고,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산의 꽃 천만 떨기에 한량들은 돌아갈 줄 모르더라” 하시니,

 

이것이 마음과 경계를 모두 남기고 망(妄)을 멸하는 공부니라.

 

 

일곱째는 안팎이 온전한 한몸[內外全體]인 공부니,

즉 공부할 때에

 

산·강·땅·해·달·별·몸·세계 등 모든 법이

다같이 참마음의 한 몸으로 되는 것이니라.

 

말끔히 비고 밝아서 한 터럭의 차이도 없어서 대천세계(大千世界)를 한 조각으로 만든다면 다시 어느 곳에서 망심(妄心)이 생길 수 있으리요?

 

그러므로 조법사(肇法師)께서 말하기를, “하늘·땅이 나와 같은 근원이요, 만물(萬物)이 나와 한 몸이라” 하니,

 

이것이 안팎이 그대로 한 몸이 되어 망을 멸하는 공부니라.

 

여덟째는 안팎이

온전한 하나의 작용[內外全用]인 공부이니,

 

즉 공부할 때에 온갖 안팎의 몸과 마음과 국토 등 모든 법과 그리고 온갖 활동을 통틀어서 모두가 참마음의 묘한 작용이라고 관(觀)하는 것이니라.

 

온갖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문득 그대로가 앞에 나타난 묘한 작용인 것이라. 이미 모든 것이 다 묘한 작용이거니 허망한 마음이 어디에 붙을 수 있으랴?

 

그러므로 영가(永嘉)께서 말씀 하시기를, “무명(無明)의 진실한 성품이 곧 부처 성품(佛性)이요

 

허깨비같이 빈 몸이 바로 법신이라” 하시고,

 

지공(誌公)의 12시가(詩歌)에 말하기를, “첫새벽 인시(寅時)여, 미친 탈춤 속에 도인(道人)의 몸이 숨었도다.

 

앉고 누움이 원래 도인줄 모르고 공연히 바쁘게 고통만 부르도다” 하시었으니,

 

이것이 안팎이 완전히 하나의 작용이 되어 망을 쉬는 공부니라.

 

 

아홉째는 본체 그대로가 작용[卽體卽用]인 공부니,

 

즉 공부할 때에 참 본체의 한 맛[一味]인 공적에 부합하나 그 가운데에 안으로 신령한 밝음[靈明]을 숨기는 것으로 곧 본체 그대로가 곧 작용이 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영가께서 말씀 하시기를,

“성성(惺惺: 또렷또렷함)하고

적적(寂寂: 고요함)은 옳고,

성성하나 망상(妄想)함은 그르며,

적적하고 성성함은 옳고,

적적하나 무기(無記: 감각 없음)함은 그르다 하니,

 

이미 적적한 가운데 무기를 용납치 않고 성성한 가운데 망상을 용납치 않으면

온갖 망상이 어찌 생길 수 있으리요?

 

이것이 본체 그대로가 작용이어서 망(妄)을 멸하는 공부니라.

 

열째는 본체와 작용을 뛰어넘는[透出體用] 공부니, 즉 공부할 때에 안팎을 나누지 않으며 동·서·남·북도 가리지 않는 것이니라.

 

사방과 팔면을 몽땅 하나의 큰 해탈문(解脫門)으로 삼아 둥글둥글하여 본체와 작용을 나누지 않고 털끝만큼의 누락도 없이 온몸으로 한 조각[一片]을 이루면 망심이 어디서 일어나리요?

 

옛사람이 말말하기를, “온몸이 꿰맨 자국이 없는지라 위아래가 온통 한 덩어리라” 하니,

 

이것이 본체와 작용을 뛰어넘어 망심을 멸하는 공부이니라.

 

이상의 열 가지 공부하는 법을 다 쓸 필요가 없으니,

 

다만 한 부분만을 찾아서 공부가 익어지면 망혹이 절로 사라지고 참마음이 즉시에 나타나리니,

 

근기와 전생 습성에 따르되 어느 법에 인연이 맞는지를 살펴서 잘 익혀 나갈 지어다.

 

이 공부는 공용 없는 공부요 애를 써서 하는 공부가 아니니

 

이들 망심 쉬는 법문이 가장 긴요하므로 치우쳐 많이 말하였으니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말지어다.

 

선문촬요 보조진심직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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