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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나’와 ‘나 아닌 것’

마음을 다스려라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니, 

 마하가섭만이 빙그레 웃었다’는 일이 있었다. 

 ( 拈華示衆微笑 염화시중미소 )

 

세존 석가모니불이 영산회상에서 법을 설하셨다.

그때 세존이 한 송이 꽃을 들어서 대중에게 보였다. 대중들은 모두가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였는데, 다만 가섭(迦葉)만이 빙긋이 웃었다. 

 

이에 세존이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정법의 안목을 갖추었고, 

열반에 이른 미묘한 마음이며, 

상(相)이 없는 실상인 불가사의한 법문이 있느니라. 

이는 문자를 세우지 아니하고, 

말 밖에 따로 전하는 법이니, 

이를 마하가섭에게 부촉한다.’ 



이는 붓다께서 설법을 듣고 있는 대중들 앞에서 꽃 한 송이를 집어 들고는 오랫동안 말씀이 없었던 사건에서 비롯된 이야기다. 설법을 들은 대중들은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신 붓다를 보고는 꽃을 든 의미를 알아내려고 저마다 골똘히 생각했다. 잠시 후 붓다께서 갑자기 미소를 지으셨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붓다와 그 꽃에 미소를 지었기 때문에 붓다께서도 미소로써 답하셨던 것이다. 

 

붓다의 행동을 보고 미소를 지었던 이의 이름은 마하가섭이었다. 그러자 붓다께서는 ‘내 통찰력의 보물을 마하가섭에게 전수하노라’고 하셨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전부다. 

 

이 일이 있은 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예로 들며 그 의미를 분석하고 나름대로 제각기 붓다의 행동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언급해왔다. 사실상 붓다의 행동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누군가가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여주는 것은 그 꽃을 보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상대방이 자신의 일로 인해 애를 태우는 중이라면 꽃을 보여주어도 보지 못한다. 오직 다른 잡념에 빠져들지 않고 온전히 몸과 마음을 하나로 한 사람만이 바로 그 순간 꽃을 만날 수 있으므로 미소를 지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문제다. 



언제 어디서라도 현재의 순간마다 온전하게 몸과 마음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놓치고 말 것이다. 누군가가 내게 아름다운 마음을 전한다 해도 우리가 다른 문제에 정신이 팔려 있다면 그 마음을 만날 수 없다. 온전하게 느끼려면 항상 몸과 마음이 함께해야 한다.

 

 

쓸데없이 다른 사람의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로 

당신의 생애를 낭비하지 말라. 

현재만이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를 어떻게 사느냐이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온전하지 않은 눈, 즉 온갖 생각에 팔려 있는 눈에는 길가에 피어난 작은 들꽃이 보이지 않는다.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그 눈에는 꽃이 피는 봄의 생기 있는 모습도, 녹음이 우거지는 여름의 싱그러움도, 낙엽 지는 가을과 눈 내리는 겨울의 아름다운 경치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이루고자 하는 일의 결과와 누리고자 하는 사회적 지위만이 머릿속을 맴돌 뿐이다. 

 

보아도 보이지 않는 눈에는 

그저 스치고 지나갈 뿐이지만, 

온전한 눈에는 사소하다고 생각되는 사물에도 

엄청난 신비가 깃들어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를 두고 선문답에는 흔히 




‘네 앞에 있는 그 물건, 

 그것이 바로 도(道)’라고 한다. 




그러나 온전하지 않은 눈에는 본바탕 그대로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져 있어도 보일 리 없다. 그저 대충 보고 자신의 생각으로 결론을 내려서 판단하고 행동할 뿐이다. 

 

온전하게 본다는 것은 

남다른 기술이나 특별한 방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지금, 여기’서 

밖으로 달려가려는 마음을 다독거리는 일, 

즉 몸과 마음을 하나가 되게 함으로써 

현재 순간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일일 뿐이다. 

 

흔히 그것을 ‘노력 없는 노력’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얻거나 달성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오로지 주어진 상황을 온전하게 알아차리기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조주(趙州)스님이 법당에서 

예불하는 스님을 보고는 한 대 때렸다.

‘예불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까?’

‘좋은 일도 아무 일 없느니만 못하다.’ 

(好事不如無)

                                                        

                                        「趙州錄」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일 없느니만 못하다고 한 조주스님의 가르침은 비록 훌륭한 일이라 할지라도 하지 않는 것(無爲)보다 못하다는 데 있다. 

 

여기서 하지 않는 것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온전하게 알아차리기 위해 어떤 목적을 정하지 않고 오로지 몸과 마음을 함께하는 일이다. 그런 뜻에서 보면, 부처가 되려고 애쓰는 것이나 굳이 명상이라는 자세를 고집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한 일이 된다. 

 

뿐만 아니라 그저 목탁을 두드리며 입으로만 예불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붓다께서 말씀하신 정법의 안목 또한 특별히 뛰어난 견해라 할 것도 없다. 



일체의 존재는 

원인과 조건들이 모여서 형성된 것이므로 

그 자체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똑바로 보는 것, 

그것을 말한다. 



원인과 조건으로 인해 형상을 이룬 것들은 인연이 다하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뿐이다. 홀연히 생겨났다가 덧없이 사라지는 현상을 굳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곧 망상일 따름이다. 

 



원인과 조건에 의해 형성된 모든 것들은 

꿈과 같고, 물거품 같고, 허깨비 같고, 그림자 같다. 

또한 이슬과 같고, 번갯불과 같으니 

응당 그와 같이 보아야 한다. 

 

                                  「金剛經」 三十二章 



 

우리의 모습 또한 단지 겉보기로는 변화가 없거나 매우 느리게 변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실제의 상태로는 지극히 짧은 순간이라도 같은 존재가 아니다. 비슷한 형상들이 연이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기 때문에 그 변화를 감지하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꿈과 같고, 물거품 같고, 허깨비 같고, 그림자와 같다고 한 것이다.

 

모습만 그렇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변한다. 

 

우리의 마음은 몸보다도 더 빠르게 바뀌고 달라지는 영상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것은 누가 그렇게 만든 것도 아니지만 일부러 그렇게 보려고 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애써 그것을 외면하거나 그 변화를 부정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무상(無常)하다고 하지만, 무상이란 말은 인생이 허망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모든 현상이 잠시도 머물지 않고 

순간적으로 변한다는 것을 바로 봄으로써 

행여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것이 있다는 

착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속되지 않는데도 지속되는 무엇이 있다고 

여기고 싶은 것은 

바로 ‘나’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낮과 밤이 흘러가서

인생은 어느덧 종착지에 다다르니

유한한 존재의 여정은 끝나가네.

마치 강물이 흘러가 버리듯. 

 

                 「那先比丘經」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존재라고 믿고 싶은 생각이 ‘나’에 대한 망상에 매달리게 만들지만, ‘나’에 대한 집착은 대상 세계도 변하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그와 같은 집착은 매우 은밀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끈질기다. 

 

우리의 언어습관 또한 끊임없이 그런 집착을 부채질한다. 모든 이름들이 대상들의 변화하는 실상을 나타내기보다는 그것의 고정된 면만을 강조하는 것이 그렇다.



설령 나를 ‘나’라고 표현한다 해도 

그것은 은유적인 개념일 뿐이다. 



‘나’의 경계를 나의 피부로 할 것인지, 

‘나’라는 인간으로 할 것인지, 

좀 더 넓혀서 내 가족으로 할 것인지, 

더욱 넓혀서 인류로 할 것인지는 정하기 나름이다. 

 

세상을 확대된 자신으로 보고 세상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로 여긴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지만, ‘나’라는 말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떤 뜻으로 사용되는가를 이해해야 

 

‘나’와 ‘나 아닌 것’을 나누는 구분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상을 여유롭게 만드는 마음의 기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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