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부처가 신체의 특징으로 인해 깨달음을 얻는다고 생각하지 마라. 부처는 신체의 어떤 특징 때문에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은 이가 모든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본다고 생각하지 마라. 깨달음을 얻은 이는 모든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당신의 발을 생각해 보세요. 내가 발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말하기 전에 당신에게 발이 있었나요? 당신의 알아차림(앎) 안에 발이 존재했나요? 지금 발이 있는 자리에 발을 둔 게 당신인가요? ‘어떤’ 것이 그렇게 했습니다. 하지만 몇 찰나 전에는 당신에게 발이 없었습니다.
이야기가 없으면 발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이와 같습니다.
나는 현실로 깨어난 경험을 한 뒤 몇 달 동안,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그 눈물 속에는 슬픔이 없었고, 세상의 어떤 것도 내 것이 아니라는 알아차림과 감사만 있었습니다.
내가 잃은 것은 내 몸이 아니었습니다. 요양원 다락방 바닥에서 한 첫 경험에서 나는 이미 몸을 잃었습니다. 그것은 이와 같았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의자를 보고는 그것이 의자가 아님을 깨닫고, 그 깨달음조차 잃습니다.
걷는 곳이 없고,
걷는 자도 없고,
바닥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뒤 어떤 사람이 들어와서 “안녕하세요, 케이티”라고 말하고, 당신이 얘기하는데, 당신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의 마음에게 얘기하고 있음을 압니다. 다른 누가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그렇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은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돌아감이 없습니다. 돌아갈 곳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더 깊은 수준으로 서서히 사라집니다. 하지만 항상 확고한 무엇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도 붙잡지 않습니다. 그것조차 실재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가질 수 없습니다.
어떤 진실도 가질 수 없습니다.
탐구는 그 모든 것을 앗아 갑니다.
내게 존재하는 단 하나는 막 일어난 생각뿐입니다.
생각 이전에는
아무것도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들어 낼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또다시 우리는
생각들 사이의 공간으로 돌아갑니다.
불이(不二, 비이원성)를 가르치는 스승들 중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 말이 진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붓다가 말하듯이, 진실한 것도 아닙니다.
진실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진실은 ‘이것 아니면 저것’의 어느 한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에는 십억 가지 측면이 있고, 아무 측면도 없습니다. 진실처럼 보이는 것에 반대편이 있다면, 그것은 진실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사물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저 행복하기만 바랄 뿐입니다. 우리의 자연스러운 상태는 행복이지만,
자기의 생각을 믿으면
그 결과로 스트레스를 느낍니다.
만일 사람들이 지금 고통을 겪고 있다면, 그들이 본래 완전하다거나 그들의 자연스러운 상태가 행복이라고 말하는 게 결국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당신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 진정 무엇인지를 얼핏 엿보게 해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질문되지 않은 생각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지하세계가 있습니다. 그런 생각들은 그런 통찰을 덮어 버리고, 그들을 다시 악몽 속으로 데려가 버립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와서 “길을 잃었어요”라고 말할 때, 당신이 길을 알고 있다면 길을 가르쳐 주는 게 친절함입니다. “여기에서 오른쪽으로 돌고, 저기에서 왼쪽으로 돌면 큰 거리가 나옵니다. 거기에서 곧장 가면 됩니다.”
창조된 모든 것은 소멸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순수한 상상입니다.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면, 그 말을 믿는 자는 빼놓게 됩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 생각이
우주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 시작 이전에는 어떤 것도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없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만 있습니다. 0은 가질 수 없습니다. 0이란 사실 0을 상상하는 하나입니다. ‘어떤 것(something)’만이 ‘아무것도 없음(nothing)’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각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이미 과거 속에 있음을 우리는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진정으로 깨달으면,
이 알아차림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증명하거나 가르쳐야 할 진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무리 선의의 가르침이더라도, ‘어떤 것’을 가리키게 됩니다.
침묵이 ‘지금 있는 것’을
더 정확히 표현하는 까닭은 그 때문입니다.
침묵은 붓다 마음의 반영이며,
모든 말이 진실이 아님을 알고,
깊은 무언의 웃음으로 끊임없는 창조를 쏟아냅니다.
당신이 다루어야 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생각뿐입니다.
당신의 아름다운 세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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