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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중생이 중생인 까닭은,



수보리여, 여래는 모두 갖추어 알고 보나니

이 모든 중생들이

한량없는 복덕을 이와 같이 증덕證得하리라.

 

 

본래 모르므로 갖추어 아는 것이며

본래 안 보이니 갖추어 보느니라.

이렇듯 중생의 빚을 떠안고도

도리어 저들을 제도한다니 누구 얘기인지!

 

 

금강金剛 눈 속의 산과 바다 변함없는 창조 신神이요

안팎 없이 삼세三世를 쳇바퀴 도는 쇠붙이 다람쥐로다.

티끌 먼지 속마다 천만 개의 강 소용돌이쳐 흐르고

굽이굽이 물결 위에 셀 수 없는 하늘의 바다로다.

 

 

 

여래의 지견知見을

直饒[직요, 입맛대로 마음껏 떠들어 젖히곤]하지 말라.

올 것이 오고 갈 것이 가니 다만 업인業因이요, 

과보果報가 확실하지만 여래는 아는 것이 없어 

오고가는 자취가 없고 과보果報도 없느니라.

지견知見은 무업無業이라 제 보는 줄 알되 

심식心識을 기대지 않기 때문이다.

 

 

복덕福德이 무량한 것은 

얻음이 커서가 아니라 없기 때문이다.

不思議(부사의)하므로 저들이 서로 比量(비량)하여 이르되,

“좀 멀다.” 혹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이르니

인과를 좇아 하는 소리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다.

 

 

목숨이 끊어지는 그때에 영생을 얻고

일체가 괴로우니 곧바로 극락으로 돌아간다.

영생과 극락을 얻고자 하는가?

얻을 것이 없으매 잃을 것이 없느니라.

 

 

말 없는 부처가 그대의 입을 통하여 다다르려면

의론議論을 버리어 의론하고 

사량思量을 떠나 사량하여야 하리니

필경 형상形相과 명색名色에 의지함이 없어야 하리라.

형색形色을 떠나라 이르니 더욱 형색形色이 분명하고나!

 

 

하늘이 높고 끝없는 까닭에 푸르다 이르며

땅은 보이지도 닿지도 않으므로 넓다 이른다.

푸르고 넓음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늘과 땅이 아닐진대 그대의 몫도 아니니라.

 

 

福과 德이 둘이 아닌 것은 이와 같이

밖의 경계로부터 구하여 거둔 것 아닌 때문이라.

內心에서 저절로 나오는 까닭에

안이라는 밖이 없고

밖이라는 內心 또한 없느니라.

 

 

그리하여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요,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도 아니로되 

안팎을 버리고 챙기지도 않는 까닭에 

다만 “이와 같이 여실하다, ”하여

여시如是 래來한 것이므로

tathagata(여래)라 불렀다.

 

 

여래如來는 석가의 投企(투기)다.

나아가 여래는 법계法界의 자기 무화無化이다.

 

 

세상은 삼계[欲, 色, 無色]로서, 세존을 알아볼 수 없다.

세상은 다만 세상과 삼계三界만을 보기 때문이다.

만일 세존을 볼 수 있다면 그 자신이거나 남인데

만일 남이라면 동등하거나 이하일 뿐 

超絶(초절)이 아니어야한다.



    초절

      1.    인식이나 경험의 범위를 벗어나 그 바깥에 존재함

      2.    벗어나 뛰어넘다

 

 

 

해탈解脫은 껍질을 벗는 일종의 변신變身이 아니라

self-negation (자기부정)이어야 하므로 

중생은 단절斷切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단절斷切이라면 

중생은 해탈을 도모할 수 없어야 한다.

따라서 중생의 해탈은

선험적 본질[a priori]로서만 가능하다.

 

중생이 중생인 까닭은, 

따라서, 해탈이 중생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존재를 삼켜 허공을 뱉아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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