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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근본적 지혜

 

 

고통에서 벗어나는 근본적인 지혜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반야란 무엇인가? 반야란 곧 지혜다. 매 순간 모든 생각이 어리석지 않고 항상 지혜를 행하는 것을 반야행(般若行)이라고 한다.

 

한 가지 생각이라도 어리석음에 빠지면 반야는 사라지고, 한 가지 생각이라도 지혜로우면 곧 반야가 나온다.

 

사람들은 마음속이 항상 어리석으면서도 ‘나는 닦는다’고 말한다. 반야는 형상이 없으니 지혜가 생겨나는 것이 바로 반야다”라고 했다.

 

반야(般若, prajna)는 지혜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혜가 아니라 속세를 벗어난 지혜다. 속세를 벗어난 지혜란 무엇일까?

 

《중니가야》에서 부처가 선정한 후에 제1선, 제2선, 제3선, 제4선에 들은 뒤 ‘삼지(三智)’로 들어갔다고 했는데, 이 삼지가 바로 반야이며 속세를 벗어난 지혜이자 번뇌를 철저히 떨쳐 낸 지혜다.

 

《중니가야》에 기록된 부처가 성불한 과정을 보면 최종적인 반야는 윤회, 업력, 사성체(四聖諦) 등 몇 가지 지혜를 깨닫는 것이다.

 

반야심경의 첫 구절에 나오는

 

“깊이 행한다"가

 

行深

 

선정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면 관자재보살의 깨달음은 부처가 성불한 과정과 완전히 일치하게 된다.

 

선정을 하여 반야로 들어가 반야로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보고 자신과 중생을 모두 고통에서 해탈시켰다.

 

그러나 해탈하지 못한 우리들은 현실이 산처럼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그물이 우리의 몸을 친친 휘감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영웅처럼 현실에 도전하거나, 아니면 이미 죽은 노인처럼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현실을 우리 자신의 몸 밖에 있는 사물이나 에너지로 생각하고 그것들을 바꾸려고 한다면 좀처럼 바꿀 수 없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면 현실이 문제가 되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인생이 이토록 고달픈 것은 모두 잔인한 현실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 현실은 아주 냉혹해 보인다. 부모를 바꿀 수도 없고, 동료를 바꿀 수도 없다. 시험 규정이나 경쟁 규칙을 바꾸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한 해 한 해,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골치 아픈 인간관계에 얽매이고, 일하고 있는 환경에 염증을 느낀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부모가 아무리 잔소리를 하고 자기 마음을 몰라 줘도 어쨌든 내 부모는 바꿀 수가 없다.

 

일이 아무리 지겨워도 집안을 부양해야 하기 때문에 시원하게 사표를 던지고 나갈 수가 없다. 그러니 현실을 원망하며 꾸역꾸역 한평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소개한 육도의 방법이 생각의 전환을 유도할 수 있다. 생각을 바꾸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과 현실의 관계가 바뀐다.

 

우선 ‘현실을 바꾸고 싶다’는 헛된 생각에서 빠져나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게 된다.

 

육도가 성불하기 위한 수행 방법이기는 하지만 일반인이 실천할 수 없을 만큼 심오하거나 현묘한 것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육도는 인생을 대하고 생활하는 마음가짐이나 태도가 될 수 있다.

 

부처는 이런 평범해 보이는 방법을 꾸준히 실천한다면 생명이 윤회하는 방향을 돌리고 우리가 처한 현실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현실이 우리 몸 밖에 있는 사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마음이 투사된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의 현실은

 

그저 각자의 생각과 행동, 감정 등이 종합적으로 투사되어 나타난 것일 뿐이다.

 

습관적으로 현실을 외부의 힘으로 여긴다면 현실에 저항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게 되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현실을 바꾸려고 몸부림치다가 오히려 현실에 의해 자신이 바뀌고 만다.

 

반면

 

자기 자신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현실을 변화시키게 된다.

 

보시와 인욕은 두 가지 상반된 방향에서 자신과 타인의 관계를 바꾼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나이를 먹고 점점 성장하면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얻을 수 있는지, 이미 가진 것들을 어떻게 지킬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성공학에 그토록 열광하고 앞다퉈 배우려 하는 것이다. 성공학의 핵심은 어떻게 얻고 어떻게 지킬 것인가,

 

또는 어떻게 하면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을 이용해 더 많이 창출해 낼 것인가에 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어떻게 하면 타인으로 하여금 나의 바람을 충족시키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내 힘으로 타인을 바꿀 수 있는가에만 집중한다.

 

하지만

부처는 우리에게 보시를 배우라고 말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남에게 주라는 것이다.

 

부처가 말하는 보시는 자선과는 다르다. 부자가 가난한 이에게 베푸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부처가 말하는 보시는 누구라도 언제든 할 수 있는 행동이자 아주 쉬운 일이다.

 

하지만 이 작은 행동으로 우리 자신의 생활을 변화시킬 수 있다.

 

보시가 자신이 아닌 외부에 자발적으로 선의를 베푸는 것인 반면, 인욕은 외부로부터 받는 악의를 스스로 참아 내는 것이다.

 

보시는 밖에서 무엇을 구하고자 하는 생각을 바꾸고, 얻으려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남에게 주는 법을 가르친다.

 

인욕은 외부의 공격에 저항하고 보복하려는 생각을 바꾸어 악의에 악의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로 돌려주는 것이다.

악의적인 상대에게

악의와 분노로 함께 맞서는 것이 아니라

평정심을 보여 준다.

 

지계와 정진은 외부가 아닌 자기 자신을 구속하는 데 집중하는 방법이다.

 

타인이 아닌 자신을 갈고 닦는 방법이다.

 

지계는 욕망에 이끌려 행동하는 우리의 관성을 변화시키고, 정진은 타성에 따라 쉽게 물러나는 우리 자신의 관성을 변화시킨다.

 

선정과 반야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발전해 마음을 수행하게 한다.

 

선정은 우리가 복잡한 현실에서 빠져나와 평온하고 청명한 상태로 차분히 머무를 수 있게 한다.

 

반야는 우리를 갖가지 고정관념에서 끌어내 자기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이 세상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며,

 

더 나아가 우주까지 꿰뚫어 보게 한다.

 

    무엇이든 다 꿰뚫어 보게 되면

    우주 전체가 ‘공’이 되므로

    무엇을 하든 자유로울 수 있다.

 

온 우주를 자유자재로 종횡할 수 있는데 어떤 현실이 나를 옭아맬 수 있을까?

 

나를 둘러싼 현실을 외부의 힘으로 여기면

 

현실을 바꾸려고 몸부림치다가 오히려 자신이 바뀐다.

 

반면 자신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현실을 변화시키게 된다.

 

     평생 걱정 없이 사는 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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