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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고통의 두얼굴

 

 

고통의 두 얼굴

 

 

인간 고통의 대부분은 불필요한 것들입니다. 당신이 마음의 관찰자가 되지 못하고 마음의 지배를 받는 한 고통은 계속 생겨납니다.

 

고통이 생겨나는 이유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그것에 무의식적으로 저항하기 때문입니다.

 

저항은 생각의 차원에서는 판단의 형태로 나타나며, 감정의 차원에서는 부정적으로 표현됩니다.

 

고통의 강도는

현재의 순간에 얼마나 저항하느냐에 달려 있고, 얼마나 강력하게 마음과 자신을 동일시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마음은 항상

지금 이 순간을 부정하려 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합니다.

 

말하자면, 마음과 자신을 더 많이 동일시할수록, 고통은 더 심해집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을 존중하고 받아들인다면, 고통과 괴로움 그리고 에고의 지배를 받는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어떤 영적 가르침은 모든 고통이 궁극적으로 환상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문제는 이 말이 당신에게도 진리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저 믿는 것만으로 저절로 당신에게 진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머지 인생을 고통 속에서 살면서도 그것은 그저 환상일 뿐이라고 우길 셈입니까?

 

당신이 환상이라고 우긴다고 해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가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다음의 내용을 스스로 경험하여 현실로 만드세요.

 

스스로를 마음과 동일시하는 한, 다시 말해 영적인 의미에서 무의식 상태에 있는 한, 고통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서는 주로 감정적 고통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데, 감정적 고통은 신체의 고통과 질병의 주요한 원인입니다.

 

원한, 증오, 자기연민, 죄의식, 분노, 우울, 질투는 물론이고 심지어 가벼운 조바심마저도 서로 다른 형태의 고통일 뿐입니다.

 

쾌락이나 감정적 도취는 고통의 씨앗을 품고 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고통은 모습을 드러냅니다.

 

고통체는 당신이 그것을 직접 관찰하여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고통체를 관찰하고, 내면에서 그 에너지 장을 느끼고, 그것에 관심을 두는 순간, 고통체와 동일화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높은 차원의 의식이 들어옵니다. 저는 이것을 ‘현존’이라고 부릅니다.

 

 

현존의 상태에서 당신은 고통체를 목격하며 관찰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고통체는 당신인 척 가장하면서 당신을 이용할 수 없으며, 당신을 통해 더 이상 에너지를 얻을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당신은 내면의 강인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고통체는 마치 떼를 쓰는 아이처럼 다소 불쾌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해를 끼치지는 않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악하고 파괴적인 괴물이나 진정한 악마 같이 느껴지는 고통체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신체에 폭력을 가하기도 하지만, 감정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어떤 것은 당신 주변 사람이나 당신과 가까운 사람들을 공격하고, 어떤 것은 당신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당신이 삶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과 감정은 매우 부정적이고 파괴적으로 변합니다. 질병과 사고는 이런 상태에서 발생하곤 합니다. 심각한 경우에는 고통체에 시달리다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이질적이고 험악한 모습을 보일 때에는 큰 충격을 받기도 합니다.

 

그럴 때에는 상대방보다는 당신의 내면에도 그런 모습이 있는지 관찰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어떤 형태든 당신의 내면에 불행의 징후가 나타나는지 살펴보세요. 그것이 당신의 고통체를 깨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고통체는 짜증, 조급함, 우울한 분위기나 상처, 화, 분노, 우울에 대한 갈망, 극적인 인간관계를 필요로 하는 것과 같은 형태로 잠재되어 있습니다.

 

고통체가 휴면기에서 깨어나는 순간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고통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만들고 있는 고통, 그리고 여전히 당신의 마음과 몸 안에 생생히 살아 있는 과거에서 비롯된 고통이 그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힘에 다가가지 못한 상태에서 당신이 경험한 모든 감정적 고통은 당신 안에 살아 있는 고통의 앙금을 남깁니다.

 

그 앙금은 이미 그곳에 자리하고 있던 과거의 고통과 합쳐져서 당신의 마음과 몸 안에 자리 잡습니다. 물론 그중에는 어린 시절 이 세계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겪었던 고통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축적된 고통은 부정적인 에너지 장을 만들어 당신의 몸과 마음을 지배합니다.

 

만약 당신이 이 부정적 에너지 장을 그 자체로 권리를 지닌, 보이지 않은 실체로 바라볼 수 있다면, 진실에 매우 가까이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감정적 고통체입니다.

 

고통체는 휴면기와 활동기의 두 가지 상태로 존재합니다. 고통체는 시간의 90퍼센트는 휴면 상태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불행한 상황에 처한 사람은 고통체가 100퍼센트 활동 상태에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고통체를 겪으며 살아가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절친했던 이들이나 과거의 어떤 상황으로부터 상실이나 버림받는 경험을 했을 때 혹은 신체적, 감정적으로 상처를 입은 경우처럼 특정한 상황에서만 고통체를 경험합니다.

 

무엇이든 고통체를 촉발할 수 있습니다. 특히 과거의 고통 패턴을 상기시키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휴면 기에서 깨어날 준비가 된 상태에서는, 문득 떠오른 생각이나 가까운 누군가가 악의 없이 한 말에도 고통체는 활동 상태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존재하기 위해 애쓰는 모든 독립체와 마찬가지로 고통체도 살아남으려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나 고통체는 당신이 무의식적으로 그것과 동일시할 때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당신과 동일화되는 순간, 고통체는 깨어나서 당신을 지배하고, ‘당신이 되려 하고’, 당신을 통해 살아갑니다.

 

고통체는 당신을 통해서 생존에 필요한 양분을 얻습니다. 자신과 같은 종류의 에너지를 연상시키는 어떤 경험들, 가령 화, 파괴, 증오, 슬픔, 감정적 사건, 폭력, 심지어 질병의 모습으로 더 많은 고통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그것들을 먹고살아갑니다.

 

그래서 고통체가 당신을 지배하면, 그것은 먹고살기 위해 자신과 같은 주파수를 가진 상황을 당신의 인생에 만들어내려 합니다.

 

고통은 오로지 고통만을 먹고살아갑니다. 고통은 기쁨을 먹고살 수 없습니다. 고통은 기쁨을 소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단 고통체가 당신을 지배하면, 당신은 더 많은 고통을 원하게 됩니다. 그래서 고통체의 희생양이나 하수인이 되어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거나 스스로 고통을 겪기를 바랍니다.

 

혹은 두 가지 모두를 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고통을 주는 것과 고통을 겪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없습니다.

 

물론 이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당신은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고 격렬하게 반발할 겁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을 위해서든 다른 사람을 위해서든 당신의 생각과 행동이 지속적으로 고통을 유지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진정으로 자각하게 되면, 고통의 패턴은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더 많은 고통을 원한다는 건 미친 짓이며, 의식적으로 미친 상태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에고의 어두운 그림자인 고통체는 의식의 빛을 두려워합니다. 자신의 정체가 탄로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고통체는 당신의 무의식과 동일화될 때, 그리고 당신이 내면에 살아 있는 고통과 마주하는 걸 무의식적으로 두려워할 때에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고통체를 마주하지 않고 고통에 의식의 빛을 비추지 않으면,

 

고통체는 계속 살아날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체가 바라보는 것조차 두려운 위험한 괴물처럼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장담하건대 그것은 현존의 힘에 대항할 수조차 없는 공허한 유령에 불과합니다.

 

당신이 관찰자가 되어 고통체와 동일화된 상태에서 벗어나려 할 때에도 고통체는 지속적으로 활동하려 할 것이고,

 

어떤 속임수를 써서라도 당신과 동일화되려 할 겁니다. 비록 당신이 자신과 동일시하며 고통체에 힘을 불어넣지 않아도 그것은 어느 정도의 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굴러가던 바퀴가 더 이상 힘을 가하지 않아도 잠시 동안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몸의 여기저기에서 고통과 통증을 느낄 수도 있지만 오래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현재의 순간에 머무르세요.

의식적으로 깨어 있으세요.

 

 

항상 깨어 있는 내면의 보호자가 되어야 합니다. 고통체를 직접 주시하여 그것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현재의 순간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고통체는 당신의 생각을 지배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이 다시 고통체의 에너지 장과 이어지는 순간, 당신은 고통체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고, 고통체는 다시 당신의 생각을 먹이삼아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가령 분노가 고통체의 에너지 진동을 주도하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했던 일에 대해 분노하면서 그 사람에게 어떻게 되갚아줄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면,

 

당신은 무의식의 상태로 빠져버리고, 고통체가 ‘당신’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분노의 밑바닥에는 항상 고통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혹은 우울감에 휩싸여 부정적인 마음의 패턴에 지배당하고, 인생이 정말로 형편없이 굴러간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생각은 고통체와 연결되고 당신은 무의식에 빠지며 고통체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가 됩니다.

 

‘무의식적’이라는 것은

 

어떤 정신적, 감정적 패턴을 자신과 동일시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곧 관찰하는 자로서의 자신이 존재하는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한 가지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당신이 고통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한, 당신은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아감각의 일부를 감정적 고통에 쏟아붓는다는 건 고통을 치유하려는 모든 노력에 무의식적으로 저항하고 그를 방해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렇게 저항하고 방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간단합니다. 자아를 손상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당신의 중요한 일부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무의식적인 과정이어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자각하는 것뿐입니다.

 

빛을 받으면 무엇이든 빛이 된다

 

고통에 얽매여 있거나 얽매어 있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당신은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고통체는 하나의 독립체에 가까운 에너지 장으로, 당신의 내면에 일시적으로 머물고 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흐르지 않는, 덫에 걸린 삶의 에너지입니다.

 

물론 고통체가 그곳에 머물게 된 것은 과거에 일어났던 어떤 일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고통체는 당신 안에 살아 있는 과거인 셈입니다. 자신을 고통체와 동일시하는 것은 곧 과거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이 피해자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 진실과는 정반대로 과거가 현재보다 더 강력하다고 믿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리고 그들이 과거에 당신에게 했던 행위가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여기게 됩니다. 또한 당신의 감정적 고통뿐 아니라 당신이 진정한 자신일 수 없는 이유도 그들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진실은

그곳에 존재하는 유일한 힘은 이 순간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존의 힘입니다.

 

일단 그 힘을 깨닫게 되면,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내면에 대한 모든 책임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에게 있다는 것을,

 

그리고 과거는 지금 이 순간의 힘과 싸워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무의식은 고통체를 만들고, 깨달음은 그것을 다시 본래의 상태로 변화시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우주의 법칙을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모든 것은 빛을 받아 드러나고, 빛 그 자체를 받으면 무엇이든 빛이 된다.”

 

어둠과 싸울 수 없는 것처럼, 고통체와도 싸울 수 없습니다. 싸우려고 애쓰면 내면의 갈등과 고통만 심해질 뿐입니다.

 

고통체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고통체를 지켜본다는 건 그것을 이 순간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이 순간의 나 / 톨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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