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중 유명한 구절인
‘색즉시공(色卽是空)’이 바로 어지럽히는 것, 즉 우리에게 익숙한 질서를 순식간에 깨뜨리는 것이다.
모든 유형의 사물, 만질 수 있는 모든 사물,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사물이 이 한마디로 인해서 갑자기 의심스러워진다.
‘공’을 ‘없다’, ‘아무 것도 없이 텅 비다’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해석한다면 우리 머릿속에 깊게 자리잡고 있는 인식이 뒤엎어진다.
사물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어떻게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아름다운 여인, 빛나는 명성이 버젓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었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깊이 들어가면 ‘공’을 ‘없다’ 또는 ‘텅 비다’로 해석하는 것이 부처의 본래 뜻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색즉시공의 ‘공’은
없다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사물이 그저 인연에 따라 만나고 인연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어서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주식이 ‘공’이라고 하면 주식은 존재하지만 인연에 따라 모이는 존재라는 의미다.
결혼, 사랑, 일 등 세상 모든 일이 그렇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3D 영화를 볼 때 특수 안경을 쓰면 영화 속 배우들이 내 눈앞으로 달려드는 것 같지만 손을 뻗어 보면 만져지지 않는 것과 같다.
부처는 모든 문제에 대해 특별한 관점에서 해답을 제시했다.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그 문제에 끌려가다가 점점 늪에 빠져 자유롭게 걸을 수 없게 된다.
주식 투자를 할 때도 주식이 사람을 끌고 가고, 직장을 구할 때도 일자리가 우리를 끌고 간다. 그런데 이때 반야심경에서 주식도 일자리도 모두 공이라고 일깨워 주면
우리는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더 높은 시야에서 주식과 일자리를 바라보게 된다.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주식과 일자리를 바라보면 또 다른 현실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당나라 때 협산선회 선사는
“중생은 색(色)만 보고
심(心)은 보지 못한다”고 말했다.
반야심경은 모든 문제를 심의 경지로 이끌어 간다. 심의 경지에 도달하면 그저 마음 하나만 바꿀 뿐인데 모든 것이 달라진다.
어떤 이가 백록현단 선사에게 “무상불(無相佛)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백록현단 선사가 “해변의 돌사자다”라고 대답했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고 다시 묻자 백록현단 선사가 대답하기를
“마음이 있다면 물 위에 있을 수도 있으니 파도와 모래도 무섭지 않은 것이다”라고 했다.
속세에 아무리 파도가 치고 진흙과 모래가 있어도 마음만 있다면 진흙 속에서 연꽃을 피울 수 있다.
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어떻게 마음이 없을 수 있나요? 제 심장이 이렇게 뛰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분노나 기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라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다. 심장이 쉬지 않고 뛰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심’이 아니다. 심장이라는 기관이 뛰고 있을 뿐이다. 또 분노나 기쁨을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은 ‘유심(有心)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심’의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한산의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내 마음은 가을 달 같고 푸른 연못은 티 없이 맑구나. 어느 것도 비교할 수 없는데 내 마음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내게 마음이 하나 있는데 가을 하늘의 밝은 달처럼 티 없이 맑아서 어떤 것으로도 비유할 수 없으니 그것에 대해 말하려고 해도 말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말할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로 말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 가장 심오한 존재이고 가장 강한 힘의 원천이다.
세상은 번화하면서도 또 황량하다. 가을 달처럼 맑은 사람들의 마음이 황폐해지고 또 그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마음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진정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온종일 허영심에 가득 차 속세에서 말하는 성공과 행복을 좇는다. 하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실패하고 불행해진다.
종종 인생을 도박에 비유하곤 한다. 인생은 정말로 도박과 같다. 우리는 갖가지 게임의 규칙 속에 매몰되어 어떻게 하면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는지 골몰한다.
게임에 파묻혀 있으면 늘 자기 패를 좋은 것으로 바꾸고 싶다거나 게임의 기교를 길러 상대를 이기고 싶다는 생각에 몰두하지만 대부분은 마지막에 빈털터리가 된다.
반야심경은 이른바 게임의 규칙, 더 나아가 이 세상 그 무엇도 당연한 것이 아니며, 대부분은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의식 속에 가라앉은 습성일 뿐임을 일깨워 준다.
우리는 언제든 그것을 벗어날 수 있다. 우리가 그 속에 매몰되어 있음을 자각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저 환상일 뿐이다.
또 반야심경은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바로 사실은 우리가 자기 운명을 결정한다는 점이다.
현실이란 우리의 마음이 투사된 것이다. 눈앞에 맞닥뜨린 현실은 바로 자신이 만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밖에 강하고 큰 ‘현실’이 있다고 착각하고 성장을 ‘현실’과 타협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착각이 번뇌에 사로잡힌 평범한 인생들을 수없이 만들어 낸다.
인생을 한바탕 도박에 비유한다면, 우리가 자신의 패를 결정할 수는 없지만 이 도박이 우리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인생에서 승패를 목적으로 삼는다면 우리가 만들어 내는 현실은 전투가 되고, 우리가 성공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만 몰두한다면 끊임없이 실패의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반면, 심미를 목적으로 한다면 우리가 만들어 내는 현실은 놀이가 되고, 한바탕 도박도 그저 재미거리가 될 것이다.
또 평정심을 목적으로 한다면 우리가 만들어 내는 현실은 수행이 되고, 도박은 우리에게 존재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단지 진정한 모습만이 있을 뿐이다.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기 위한 여정에 들어서야만 우리가 진정으로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고, 승패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고 고락의 순환을 뛰어넘어 평정한 바다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야만
성공을 위한 불변의 비결을 얻겠다거나
불변의 기쁨을 누리겠다는 헛된 생각을 갖지 않고,
생명의 여정 속에서 생명과 존재의 진정한 모습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가 비로소 운명의 주인이 되어 무엇을
하든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평생 걱정 없이 사는 법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