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끝나는 곳에 고향이 있다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 故心無罫礙 無罫礙故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얻을 바가 없으므로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에 의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어지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지고 뒤바뀐 생각을 멀리 여의게 되어 마침내 열반에 이르게 되느니라.
보살은 대승불교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보살은 보리살타(菩提薩埵, bodhisattva)의 준말이다.
보리(菩提, bodhi)는 깨달음[覺]의 뜻이며, 살타(薩埵, sattva)는 중생 또는 유정(有情)의 뜻이니, 각유정(覺有情)으로 번역한다.
보살은 깨달은 중생, 깨달은 사람, 깨달으신 분을 말한다. 그리고 중생을 깨우쳐주는 분, 유정(有情)들을 깨닫게 해주는 분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큰 원을 세우고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수행하는 보살은 얻는 바가 없기 때문에 마음에 아무 걸림이 없다.
아무 걸림이 없기 때문에 그 어떤 두려움도 없으며 전도(顚倒)된 꿈같은 생각을 멀리 여의고 구경의 열반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반야바라밀을 수행하여 모든 존재의 실체가 공한 줄 깨달아 아무 얻을 바가 없는 무소득(無所得)이기 때문이다
以無所得故
무소득은 소득이 없다는 말이다.
소득은 능득(能得)의 상대적인 개념이다.
능(能)은 주(主)이고 소(所)는 객(客)이다. 얻는 주체가 능이라면, 얻어지는 대상이 소득(所得)이다.
모든 것[諸法]은 상호의존하는 인연 따라 존재하는 것으로 실체가 없는 공한 것이다.
이 공(空)을 바탕으로 존재하는 모든 법은
생기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不生不滅
더러움도 깨끗함도 아니며
不垢不淨
늘어남도 줄어듦도 아닌 것이다.
不增不減
공에는 모든 상대(相對)가 사라지니
주(主)와 객(客)이 없고
앞뒤가 없으며 좌우가 없고
안팎이 없고
나[我相]와 너[人相]가 없으며
능(能)과 소(所)가 없고
유(有)와 무(無)가 없으며
득(得)과 실(失)이 없다.
그런 까닭으로 공을 바탕으로 상호 연기하여 존재하는 것은 주(主)는 주가 아니고 객(客)은 객이 아니며, 나는 내가 아니고 너는 네가 아니며, 능(能)은 능이 아니고 소(所)는 소가 아니며, 득(得)은 득이 아니고
실(失)은 실이 아니다.
얻을 것이 없으니 잃을 것 없고, 잃을 바가 없으니 얻을 바 없다.
모든 존재의 연기하는 바탕[體]이 공(空)이며 이 공의 용(用)이 바로 연기인 줄 깨달은 사람의 삶은 그 어디에도 얽매임 없는 사람이다.
내가 없고 네가 없으며, 나는 내가 아니고 너는 네가 아니니, 너는 바로 나이고 나는 바로 너이다.
모든 분별을 내어 서로 대비(對比)가 되는 것이 상대(相對)이다. 이 상대되는 것을 바로 상(相)이라고 한다.
상(相)이란 ‘티’를 내는 것이며 ‘척’ 하는 것이다. ‘티’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촌스런 티, 귀한 티, 점잖은 티, 어린 티, 늙은 티, 젊은 티 등이다.
‘척’은 일부러 하는 짓이다. 잘난 척, 못난 척, 어리석은 척, 똑똑한 척, 아는 척, 모르는 척, 알아도 모르는 척, 몰라도 아는 척 등이다.
이러한 분별의 티가 나지 않는 것이 바로 상(相)이 없는 것이다.
티가 나면 분별이 생기는 것이니
‘나’라는 티가 나는 것을 아상(我相)이라고 하며,
너라는 티를 내면 인상(人相) 또는 법상(法相)이라고 하며,
미혹한 못난 티가 나면 중생상(衆生相)이라고 하고, 나고 죽는 티를 수자상(壽者相)이라고 한다.
그래서 『금강경』에
“만약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으면 보살이라고 하며,
만약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若無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卽
是菩薩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卽
非菩薩
이렇게 아무 상이 없는 보살은 상대를 짓는 티가 나지 않는다. ‘너’다 ‘나’다 하는 분별을 내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것을
무주상(無住相)이라고 한다.
무엇을 주고받으면서도 주었다거나 받았다는 집착이 없는 보시를 무주상 보시라고 한다.
보살은 이것이니 저것이니 하는 분별의 상을 나누지 않고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삶을 사는 분이다.
오른손에 들고 있는 물건이 무거우면 왼손이 함께 드는 것이다. 왼손이 오른손을 도와준다는 생각 없이 그냥 함께 드는 것이다. 서로 따로따로가 아니고 별개가 아닌 하나인 것이다.
왼손도 오른손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없다. 발이 가려우니 손으로 긁어주면서 생색내지도 않는다. 배가 아픈 데 약통을 둔 곳에 손이 닿지 않으면 발이 그곳으로 몇 걸음 옮겨 가면서 서로 흥정하지 않는다.
배가 아프니 눈을 뜨고 약이 있는 곳을 찾고 발로 걸어가 손으로 집어 입으로 삼키는 것이 바로 무주상의 삶이다.
아픈 배와 감은 눈과 발과 손과 입이 서로 돕는다는 티를 내지 않고 그냥 함께 하는 그것이 무주상(無住相)이다.
함께 아파하는 마음,
그것이 동체대비(同體大悲)이다.
그래서 유마(維摩) 거사는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라고 하였다.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은
안 한 척하라는 것이다.
왼손이니 오른손이니 하는 분별을 내지 않고, 한 몸이 되어서[同體] 서로 티 내지 않고 서로 의존하는 연기의 삶을 사는 것이 보살이다.
우리 몸의 심장, 위장, 간장 등 오장육부와 근육과 골격, 혈액 순환이 양호하여 피부에 윤기가 흐르다가 가시에 찔리거나 무슨 요소가 결핍되면 살갗에 티눈이 생긴다.
문제가 생긴 것이다. 티눈이 생겨 흐름이 막힌 것이다. 티가 생기면 이것을 ‘동티’라고 한다.
건드리지 않아야 될 것을 건드려서 재앙을 불러오는 것이 바로 동티이다.
상(相)이 생기고
상대가 생기는 것이 동티이다.
온갖 상이 생기면 중생이라고 한다.
우리 중생은
동티 덩어리 곧 일체개고 이다.
一切皆苦
티눈이 생기면 흐름이 막혀 멈추게 되고, 그 자리에 흐름이 맴돌면서 티눈이 점점 자라게 된다. 이것이 집착이다.
그러한 멈춤을 주(住)라고 한다.
보살의 삶은
모든 존재가 본래 공한 줄 깨달아 상이 없으니 마음이 그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고 그 어느 것에도 멈추는 것[住] 없는 걸림 없는 삶이다
故心無罣礙
보살은 끝없이 연기되는 존재들의 티[相]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공의 이치를 깨달아 중도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다.
철저히 연기의 공성(空性)을 깨달아 능(能)이 공하고 소(所)가 공하니 능소(能所)가 공하고, 능소가 공하니 능소의 분별이 사라진 보살은 그 어디에도 집착하여 멈추는 마음이 없다.
육조 혜능 대사는 『금강경』의
“머무는 바 없이 응하면서 그 마음을 낸다."
應無所住而生其心
라는 구절을 듣고 중도(中道)를 깨달았다.
머무는 바[所]가 없는 것은
그 마음에 능(能)이 없기 때문이다.
능(能)도 소(所)도 없기 때문에 어디에도 걸림이 없고 걸림 없이 살게 되는 것이다.
집착하는 바 없고 머무는 바 없이 응한다는 것은 그것을 물리적으로 버린다거나 떠난다는 것이 아니다.
응무소주(應無所住)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두고 이 현상이 연기임을 알고 대응(對應)하는 것이다.
바라보는 주관인 능(能)을 비우면 소(所)는 저절로 사라진다. 가지고 있는 것을 없애버리고 알거지가 된다고 무소유가 되는 것이 아니다.
대상을 있는 바
所有
그대로 두고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을
能
비워야 진정한 ‘무소유(無所有)’가 되는 것이다.
모든 대상이 있는 바 없고
無所有
집착할 바 없으며
無所住
얻을 바 없는 것이니,
無所得
이처럼 마음에 능소가 없고 주관과 대상이 사라지면 어떤 사물을 대하더라도 아무런 걸림이 없게 되고 걸림이 없기에 그 어떤 두려움도 없게 된다
無罣礙故 無有恐怖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실체가 없이 연기되어 나타난 것으로
꿈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은 줄을 깨닫게 되어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집착했던 그릇된 생각을 멀리 여의게 된다
遠離顚倒夢想
모든 중생은 전도된 생각을 일으켜서 모든 것이 덧없음에도 항상(恒常)한 것으로 잘못 생각하여 집착하다가 종내에는 괴로워하게 되고,
오욕의 즐거움을 구하다가 도리어 괴로움만을 더하고, 무아임에도 내가 있는 줄로 착각하고,
부정(不淨)한 것을 청정(淸淨)한 것으로 알면서 살아가니, 이것이 전도된 몽상이다.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는 사람은 모든 현상이 상호의존하면서 연기하는 공의 이치를 깨달아 본래 오고 감이 없는 줄 알며,
나고 죽음이 없음을 깨달아 그런 삶을 실천하여, 나고 죽음의 굴레를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너’라는 상호의존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서로 의존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며,
상호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은 실체가 없으므로, 나라는 것은 ‘무아(無我)의 나’이다.
본래 ‘나’가 없으니 ‘너’가 없어지고, 너와 나는 하나이니 ‘너는 또 다른 나’이면서 ‘나는 또 다른 너’인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관계 속에서 나의 정화(淨化)는 모든 이의 정화와 함께 이루어져야 하고, 나의 해탈은 모두의 해탈을 통해 이루어야 하고 나의 열반은 모든 이가 열반에 이르러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공덕을 쌓거나 기도를 할 적에 항상 다음과 같은 원을 세운다.
원하옵나니,
願以此功德
이 공덕이 모두에게 두루 미치어
普及於一切
나와 모든 생명이
我等與衆生
모두 깨달음을 이루어지이다.
皆共成佛道
능과 소가 없으니 무슨 일을 하여도 하는 바가 없어서,
태어나도 태어난 바 없고,
죽어도 죽는 바 없으며,
늘어나도 늘어난 바 없고,
줄어도 줄어든 바 없으며,
가져도 가지는 바 없고,
버려도 버리는 바 없고,
주어도 주는 바 없고,
받아도 받는 바 없다.
무엇을 잃어도 잃는 바 없고,
얻어도 얻는 바 없으며,
중생을 건져도 건지는 바 없이 건지면서,
나고 죽는 괴로움 가운데 너와 내가 모두 즐거움을 누리게 되니,
이처럼 전도된 몽상을 벗어난 삶이 열반이다.
열반의 삶이란
허깨비 같은 꿈에서 깨어나 살아가는 것이다.
모든 것이 텅 빈 공(空)은
시간도 공간도 초월했으니,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무시무종이다.
無始無終
시작도 끝도 없으니
시작이 시작 아니고
끝이 끝 아니며,
끝이 바로 시작이고 시작이 바로 끝이니
그 언제나 시작이요 그 어디에나 끝이며
그 언제나 끝이며 그 어디에나 시작이다.
내가 지금 서 있는 바로 이 자리가
중도(中道)이며 구경(究竟)인 것이다.
연기로 펼쳐진 시간과 공간 속에 얽매이고 갇혀서 전도된 고통의 악몽에 시달리며 살다가 활연히 깨닫고 난 보살은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탁 트인 허공처럼 아무 걸림이 없이 살게 되니,
이것이 구경의 열반이다.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도록 이 서원이 다하지 않고 반야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이 ‘보리살타’이다.
또한 지금의 이 자리를 영원토록 철저하게 살아가는 것이 ‘마하반야바라밀’ 수행자의 삶이다.
배울 것도 없고 할 일도 없는 한가한도인은
絶學無爲閑道人
망상을 버리지도 않고, 진심을 구하지도 않네.
不除妄想不求眞
무명의 참 성품이 그대로 부처님 성품이며
無明實性卽佛性
환영 같은 빈 몸뚱이 그대로 법신이네.
幻化空身卽法身
현봉스님 반야심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