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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나의 본모습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바로 생각이라는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순수의식의 영역은

생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드넓다.

다가오는 생각들을 모두 다 믿지는 않게 되는 그날,

나는 생각이라는 감옥에서 한 걸음 걸어 나와

생각하는 사람이 나의 본모습이 아니란 걸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생각은 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속삭이며 더 많이 갖고자 욕심을 부린다. 생각이 내가 되어버릴 때 나는 자꾸만 권태로워진다. 권태롭다는 것은 허기진 마음이 더 많은 자극과 채울 것을 원한다는 것이며 또한 그 허기가 아직 가시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권태로울 때 잡지를 집어 들거나 전화를 하거나 TV채널을 돌리거나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쇼핑을 하면서 마음의 허기를 채운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허기를 몸으로 전이시켜 음식을 더 많이 먹어서 일시적으로 만족을 얻는다.

 

 

 

이들과는 달리

권태로운 기분을 바꾸겠다는 생각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다.

 

 

 

맑은 마음이

권태로운 기분에 가 닿으면 한순간에

그 주변이 트이며 고요함이 들어선다.

 

 

 

처음에는 아주 작았던 틈새 공간이 점점 더 커진다. 그와 동시에 권태로운 느낌이 조금씩 약해지며 그리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권태도 스승이 될 수 있다. 나의 본모습이 무엇이고 나의 본모습이 아닌 것은 무엇인지 가르쳐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권태로운 사람’이

나의 본모습이 아님을 알게 된다.

 

 

권태는

다만 나의 내부 에너지가 습관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분노한 사람은 내가 아니다.

슬픈 사람은 내가 아니다.

두려운 사람은 내가 아니다.

권태·분노·슬픔· 공포는 ‘나의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마음 상태를 가리키는 지표이며,

늘 가고 오는 것이다.

 

 

가고 오는 것은 그 무엇도 내가 아니다.

 

 

‘나는 권태롭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누구인가?

 

‘나는 배고프다. 슬프다. 두렵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누구인가?

 

나는 앎 그 자체이다.

앎을 통해 지각되는 마음의 상태가 아니다.

 

편견을 가지고 있다면

‘나=생각’이라고 믿는다는 증거이다.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을 살아있는 인간으로 보지 않고 나의 사고가 만들어낸 개념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생생히 살아있는 사람을 죽어버린 개념으로 격하시키는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고요함의 지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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