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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열반의 오묘한 뜻

 

원래 무릇 열반(涅槃)의 도(道)는

도가 없으면서 도 아닌 것이 없고

 

無道而無非道

 

머무름이 없으면서 머물지 않음이 없다

 

無住而無非住

 

그 도는 지극히 가까우면서도

지극히 먼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도를 증득하는 자는 더욱 고요한 동시에 또한 더욱 시끄럽다. 더욱 시끄럽기 때문에 여덟 가지 음성[八聲]을 널리 떨쳐서 허공에 두루 미쳐도 쉼이 없다.

 

더욱 고요하기 때문에 열 가지 모습[十相]을 멀리 벗어나 진제(眞際: 진리의 끝)와 똑같게 되어 담연(湛然)하다.

 

지극히 멀기 때문에 가르침을 따라 천겁(千劫)을 쉬지 않고 계속하더라도 이르지 못한다.

 

지극히 가깝기 때문에 말을 잊고[妄言] 찾는다면 불과 한순간에 스스로 만나게 된다.

 

진실로 넓고 넓어서 끝이 없고,

깊고 깊어서 바닥에 이를 수 없다.

바닥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다하지 않음이 없고,

끝이 없기 때문에 해당하지 않음이 없다.

 

둘이 없는 진실한 성품[無二實性]에로 돌아가게 하고, 오랜 잠에서 꿈꾸는 자들을 나란히 대각(大覺)의 지극한 과보[極果]에 이르게 한다.

 

지극한 과보의 큰 깨달음이란 진실한 성품[實性]을 체득하면서도 마음을 잊는 것이다.

 

진실한 성품에 둘이 없다는 것은

진실한 것과 거짓을 섞어서 하나로 하는 것이다.

이미 둘이 없으니 무엇으로 하나를 얻으며,

 

진실한 것과 거짓이 섞여 있으니

어느 것이 진실임을 알겠는가?

 

 

 

이것은 이치[理]와 지혜[智]를 모두 잊고, 이름[名]과 뜻[義]이 끊어진 것이다. 이것을 열반의 오묘한 뜻이라 한다.

 

 

 

단지 모든 부처는 이것을 증득하고서도 (거기에) 머물지 않으며, 응하지 않음이 없고, 말하지 않음이 없다. 이것을 열반의 지극한 가르침이라 한다.

 

오묘한 뜻이면서도 일찍이 고요한 적이 없었고, 지극한 가르침이면서 일찍이 말한 적이 없다. 이것을 이치와 가르침의 한 맛[一味]이라고 한다.

 

여래가 증득하신 도의 본체는

두루 미쳐 밖이 없고, 작용[用]은 유정(有情)에 두루 미쳐서 널리 포섭하여 멀리 제도하는 데에는 이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앞서는 것이 없다는 뜻에 의해서 대(大)라고 이름 한다. 그러나 큰 본체와 큰 작용은 둘이 없어서 분별이 없다.

 

이미 도달해야 할 저쪽 언덕[彼岸: 열반]이 없는데, 어찌 떠나가야 할 이쪽 언덕[此岸: 생사의 세계]이 있겠는가?

 

떠날 곳이 없기 때문에 떠나지 않는 곳이 없다. 이에 대멸(大滅)이라 한다. 도달해야 할 곳이 없기 때문에 도달하지 않은 곳이 없다.

 

 

열반종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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