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열반은
모양을 떠나 있고 성품을 떠나 있으며,
공이 아니고, 불공도 아니며, 아(我)도 아니고 무아(無我)도 아니다.
어째서 공이 아닌가?
성품 없음[無性]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공이 아닌 것[不空]이 아닌가?
성품이 있음[有性]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또 모양 있음[有相]을 떠나 있기 때문에 비아(非我)다.
모양이 없음[無相]을 떠나 있기 때문에
무아가 아니라고 말한다.
무아가 아니기 때문에 대아라고 말할 수 있다.
아(我)가 아니기 때문에
또한 무아(無我)라고 말한다.
또 공이 아니기 때문에
참으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불공(不空)이 아니기 때문에 허망이라 말할 수 있다.
여래가 비밀스럽게 간직한 그 뜻은 이와 같다.
명(明)과 무명(無明)을
어리석은 자는 둘이라 하지만,
지혜로운 자는 그 성품이 둘이 아님을 잘 깨닫기[了達] 때문이다.
비록 범부와 성인은 그 성품이 둘은 아니지만, 범부와 성인은 하나의 성품이 될 수 없다. 어리석은 자는 둘이라 하지만,
지혜로운 자는 하나인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범부와 성인, 생사와 열반은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들어가는 것도 아니지만
들어가지 않는 것도 아니며,
나가는 것도 아니고
나가지 않는 것도 아님을 당연히 알아야 한다.
반야의 본체는 곧 이 법신이다.
성품은 스스로 밝고 통달하여 비추지 않는 데가 없다. 그러므로 반야라 한다.
해탈의 본체는 곧 이 법신이다.
모든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나 장애 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해탈이라 한다
널리 나타남에 자재하다.
경에 이르기를,
“여래가 모든 곳에 두루 가득 차 있는 것이 마치 허공과 같다. 허공의 성품은 볼 수 없는데,
여래도 또한 그러하여 진실로 볼 수가 없다.
자재하기 때문에 모두로 하여금 보게 한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것은 나타나는 것이 있으면,
즉 당연히 나타나지 않는 것도 있지만,
여래는 도대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분별해서 말하면,
진실한 나[我]는 열반의 나다.
자재한 나는 보리의 나다.
진실에 따라 관통하여 말하면 다름이 없다.
이런 까닭으로 경에서는 전체적으로 결론지어
“이와 같이 대아를 대열반이라 이름 한다”라고 한 것이다.
- 열반종요 중에서 -
≪열반종요≫는 원효가 ≪대반열반경≫의
핵심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효는 ≪대반열반경≫을 “지금 이 경은
불법의 큰 바다이고, 방등(方等)의 비밀
창고로 그 가르침은 측량하기 어렵다.
진실로 넓고 넓어서 끝이 없고,
깊고 깊어서 바닥에 이를 수 없다.
바닥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다하지 않음이
없고, 끝이 없기 때문에 해당하지 않음이
없다. 여러 경전의 부분을 통합하여 온갖
흐름[萬流]을 일미(一味)에로 돌아가게 하고,
부처님의 뜻이 지극히 공정한 것임을 열어
보여 백가(百家)의 서로 다른 논쟁[異諍]을
화해시켰다”라고 평하여, 이 경이 대승의 큰
가르침으로 경전의 서로 다른 모든 논의를
하나로 통합하는 원리를 포함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원효는 ≪대반열반경≫을
부처님의 일생 동안의 법문을 총 정리한
것으로 가장 심오한 이론을 담고 있다고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