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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공과 덕

 

견성이 ‘공’이요 평등이 ‘덕’이라


사(師)께서 말씀하시기를,

 

성품을 보는 것이 공(功)이요,

평등(平等)이 덕(德)이니,

 

생각마다 막힘없이 진실로 본성품의

묘용을 항상 보면 이를 공덕이라 일컫느니라.

 

성품을 어떻게 보는가? 그렇다면 되물으리라.

불상을 보며 어떻게 도리어 “부처를 본다.” 이르며

이웃을 만나며 어떻게 “마음을 본다.”이르는 것이냐?


보는자를 보며 보는 줄을 돌아보니 제마음이로다.

비록 마음은 누구나 다 보되 스스로 믿음이 없으니

스스로 비하하여 이르되,


“이는 별것 아니니 다르다.

저 높은 도는 상식을 벗어나고 평상을 넘어 초월이라,”

문득 마음을 쉬어 그치면 도리어 이 중생심이리라.


자책하고 되레 자만하며 퇴굴(退屈)하곤 되레 오만(傲慢)하니

스스로 공덕을 부수고 무너뜨리므로 중생인 것이요,


오는 대로 무심하며 가는 대로 담연(湛然)하여

한 손가락 움직이지 않고 무루 공덕을 지으니 불보살이다.


안으로 마음을 겸양하여 낮추는 이것이 공(功)이요,

밖으로 예(禮)롭게 행하는 그것이 덕(德)이며,


제 성품에 만법을 건립하는 것이 공이요,

마음바탕[心體]에 생각을 여의는 것이 덕이며,


제 성품 여의지 않는 것이 공이요,

활용(活用)하되 물듦이 없는 것이 덕이니,


만일 법신 중에 있는 공덕을 찾을진대

다만 이를 의지하여 지어감이 진실한 공덕이니라.

 

일러라! 제 성품을 여읜다니 어찌 가당하리오!

내 이르되, 제 성품 여의지 못함이 공(功)이라 하리라.


여의고 여의지 못함이 무엇이 다른가?

구름 걷힌 하늘에는 멀고 가까움이 없느니라.


공덕을 닦는 사람이라면

마음이 경솔치 않아 늘 넓혀 공경스레 행할 것이라,


마음에 늘 남을 경솔하게 여겨

‘나’로다 하는 마음 끊어지지 아니하면

곧 스스로 아무 공이 없고,

 

제 성품이 허망하여 실답지 못하면

곧 스스로 아무 덕이 없나니,

 

‘나’로세 내세우매 나(我)는 크나

일체(一切)는 가벼이 여기는 까닭이니라.

 

경에 말씀하시기를,

“선남자 선 여인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머물면

비록 현세에 무량한 공덕을 짓고도

작은 풍파에 모든 재물을 한 순간에 잃는 것과 같아

한 생각 국집하는 마음 때문에 일체 공덕을 잃는다.” 하시니라.


잃고 얻음이 이렇듯 큰 것은

텅 빈 마음에 채움을 집착하여 더더욱 비어진 까닭이요,


빈 마음을 비어 두면 다시 비울 것이 없으므로

일어나는 모든 생각들이 한결같아 방해되지 않은 때문이다.


선지식이여!

 

념념(念念)에 간헐(間歇: 그치고 이음) 없음이 공이요,

마음에 행하는 평직(平直)이 덕이며,


제 성품을 닦는 것이 공이요

제 몸 수양하는 것이 덕이니라.

 

화두(話頭)를 공들이는 일이 긴요하니

대저 알고도 행하지 않음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말이란 남을 위해 하는 말이거니와

그가 알아듣고 알아듣지 못함은 모두 내 책임이다.


제 성품을 보면 곧 저 성품이거니와

이미 다름을 보았다면 천만 방편설을 가지고도

결코 저를 돕지 못하리니, 허물이 내 편에 있음이라.

 

만일 내가 진실하지 않다면 이미 저는 나를 버리느니라.

내 몸 내가 닦는다니 저를 듣는 이 물건이라 스스로 듣지 못하거든

나는 이미 저에게 마구니인 것이로다.

선지식이여!

 

공덕은 모름지기 자성 안에서 볼지언정

보시나 공양 등으로 구할 바가 아니니라.

 

그 까닭에 복덕이 공덕과는 다른 것인데

저 무제가 참 이치를 깨닫지 못한 것이라

 

우리 조사께 허물이 있었던 것이 아니니라.

보시와 공덕을 달리 보는 그것이 문제 아닌가!

 

안팎이 없는 자성(自性)이거늘 어찌 달마와 무제로 나누는가?

 

건물이 밖이라 건축도 밖인 것이며

보시물이 밖이라서 공양 올림도 밖이더란 말인가?

 

무제와 달마는 실로 조달(調達)과 실달(悉達)이로다.

   조달 : 석가의 사촌

   실달 : 석가모니가 출가하기전 이름

 

하나가 높아지면 다른 쪽이 낮아지려니와

하나가 거꾸러지면 다른 쪽도 거꾸러지느니라.

 

무제가 달마를 모른 것이 아니라 달마가 무제를 몰랐다.



달마는 한마디 잘못 짚어 아홉 해를

입 다물어 면벽하였거늘

어찌 요즘 인들은

양의 무제를 탓하며 제 마음 뽐내려 하던가?

 

그런데, 무엇이 달마의 허물이든가?

 

- 육조법보단경 의문품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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