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순(隨順)’은 거스르지 않고 따름을 뜻하고, ‘득입(得入)’은 체득하여 그 경지에 들어가는 증득(證得)을 뜻한다.
우리는 과연 어떤 방편으로 진여에 수순하고 또 진여에 득입할 수 있는가?
진여를 증득한다는 것은
곧 진여인 마음이
일체 차별상에 이끌리지 않고
그 바탕인 진여를 바라본다는 것,
즉 마음이
마음 자체를 자각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곧 마음이
자기 본성을 자각하여 아는
견성(見性)을 의미한다.
그러나 마음 자체인 진여가
말해질 수도 없고
생각될 수도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 진여를 알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진여에 수순하고
진여에 득입할 수 있단 말인가?
마음 자체인 진여는
일체의 차별상을 떠난 것이다.
일체의 차별상은 망념에 따라 일어나고 언설을 따라 분별되는 것이므로,
그런 차별상을 떠난 진여를 증득하자면 일체의 망념을 떠나고 일체의 언설을 떠나야 할것이다.
그러나
일체의 생각과 언설을 떠나 어떤 방식으로 진여를 포착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에서는 진여에 수순하는 방식을 일체의 언설이나 일체의 념을 단적으로 떠나는 것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언설을 하되 그 언설에 있어
설하는 능설(能說)과 설해지는 소설(所說)이 따로 없다는 것을 알고,
념을 일으키되 그 념에 있어 생각하는 능념(能念)과 생각되는 소념(所念)이 따로 없다는것을 아는 것이
곧
진여에 수순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말하자면
언설이나 념을 단적으로 없애는 것이 아니라,
언설이나 념이 있는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서
능소의 분별을 일으키지 않으면
그것이 곧
진여에 수순하는 길이고
진여에 득입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과 언설은 차별상에 따라 이것과 저것을 분별하고 자와 타를 구분하기 위해 행해지지만,
생각하거나 언설하되
능과 소, 주와 객의 분별을 넘어선다면,
우리는 그 순간
개별적인 차별상 너머
전체 바탕인 진여에 이르게 된다.
아예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되 말을 넘어서는 것이
바로 말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이다.
전체는 개별자 안에서
그 바탕으로 확인된다.
일체 제법 안에서
그 바탕의 체로서
진여가 확인되는 것이지,
일체 제법과 분리되어
따로 진여가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원효는 수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록 말하고 비록 생각한다고 해도’라고 말하는 것은 법이 없지 않다는 것을 밝혀 공견(空見)에 대한 악취(惡取)를 떠나기 때문이다.
‘능히 말하는 자도 없고 말해질 수 있는 것도 없다’는 것은 법이 있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유견(有見)에 대한 집착(執着)을 떠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능히 알아 중도관을 따르기에 ‘수순’이라고 이름한다.
'대승기신론 강해' 중에서
*
능소能所 :
어떤 행위의 주체와 그 행위의 목표가 되는 객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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