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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매일매일이 곧 창조의 새벽



가장 행복한 사람

 

 

선禪은 물질적 세계가 환상이며 

오로지 정신만이 참되고 

영원한 진리라고 내세우지 않는다. 



선禪이 눈길을 두는 곳은 

물질과 정신 가운데 어느 것이 중요한가에 있지 않다. 

단지 스스로의 본성을 깨닫느냐에 

의미를 두고 있을 뿐이다. 

 

본성을 깨닫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본성의 깨달음이란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일이 아니라 단지 몰랐던 사실을 알아차리는 일, 즉 내 마음이 오염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투명하게 아는 것이 전부다. 

 

나를 숨 막히게 하는 욕망의 장애물을 걷어내면 

본래의 온전함을 마주하게 된다. 

인간사의 역설 가운데 가장 지독한 역설이지만, 

이보다 더 분명한 진실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단순한 이치를 모른다. 




사는 일도 마찬가지다. 삶의 순간마다 뜻밖의 행운이 다가오길 바라면서 정작 현실에는 눈을 감지만, 가장 행복한 삶이란 소박한 일상을 온전하게 누리는 일이며 



진정한 행운 역시 

‘지금, 여기’서 숨을 쉬며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중이 이 세상에서 가장 기적적인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회해(懷海)가 대답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여기(大雄山)에 있다는 사실이지.’ 

 

              「指月錄」 百丈懷海

 

 

사람들은 흔히 현재를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준비하고 희생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현재를 참고 견뎌야 할 시간이라고 스스로에게 타이른다. 때문에 부모는 중간시험을 잘 보고 온 아이에게 ‘기말시험이 더 중요하다’며 부담을 준다. 기말시험을 보고 오면 이번에는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진짜 실력’이라며 으르고 협박한다. 



아이는 물론 부모 스스로도 

지금 당장 누려야 할 기쁨과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학은 좋은 직장을 위해 사라지고, 

꽃피고 무지개 뜨는 젊은 시절은 

노후대책을 마련하느라 희생되고 만다. 



그러나 지금이 바로 그때다. 

우리의 삶은 지금 여기와 다른 어떤 때, 

어느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라는 현재의 순간에서 펼쳐지고 있을 뿐이다. 



삶이란 이미 사라진 과거의 기억도 아니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꿈도 아니다. 

그래서 오로지 현재의 순간을 사는 사람만이 

실제의 삶을 사는 것이며, 

그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한다. 




‘지금 그리고 여기’서 

과거라는 시간을 생각하지 않는 한, 

과거는 사라지고 없는 경험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미래라는 시간을 상상하지 않는 한,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 마음 가운데 과거를 허용하는 수준만큼 

과거는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내가 허용하지 않는 한 

과거는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일상적으로 ‘어제’ 또는 ‘내일’ 그리고 ‘여기’ 아니면 ‘저기’라고 하면서 시간과 공간을 분리한다. 이때 마치 자신이 선택의 여지를 가진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로 우리가 하는 것은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을’ 뿐이다. 어떤 것을 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다. 




시간 또한 과거에서 시작하여 

현재로 흘러오는 것이 아니다. 

지금이 곧 

과거의 시작이자 미래의 시작이다. 




‘과거, 현재, 미래’ 할 것 없이 시간은 영원한 ‘지금’일 뿐이다. 한정할 수 있는 시간은 없다. 과거는 지나가버려서 지금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 지금 없다. 현재 또한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으므로, 현재도 없다. 시간이란 오직 ‘지금’이라는 순간순간의 흐름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순간순간을 온전하게 사는 것, 

그것이 삶의 전부가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구체적인 현실을 만나게 된다. 



선(禪)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구체적인 현실을 만난다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이나 상태를 

온전하게 느낀다는 뜻이다.  



선(禪)의 근본이치를 들려달라고 한 중이 조주(趙州)를 졸랐다. 

그러자 조주는 이렇게 말했다. 

‘오줌 누는 일 같이 이런 사소한 일조차도 내 자신이 직접 한다.’ 

 

         「古尊宿語錄」 趙州眞際禪師語錄之餘 

 

 

흔히 무엇을 ‘안다’고 할 때 ‘지식으로 알기’와 ‘경험으로 알기’가 있지만 그 둘은 다르다. 이를테면 장미 꽃 향기를 지식으로 알기와 직접 맡아보는 것은 또 다른 세계가 된다. 

 

이처럼 ‘경험한다’는 것은, 

경험자가 대상과의 분리를 그만둘 때 가능해진다. 

이때 경험자의 지각은 대상과 온전히 ‘하나’가 된다. 

 

그러나 지식으로 알기란 

대상과 자신을 분리하여 이원화시킨다는 뜻이다. 

분리는 경험을 어렵게 만든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오줌 누는 일조차 삶의 전부일 뿐이다. 다시 말해 ‘불교는 무엇이다’라거나 ‘인생은 이런 것이다’라는 관념에 빠지지 않는 일이야말로 온전하게 경험하는 일이다. 

 

온전하게 사는 길 또한 

지식으로 마주하는 이원화의 세상이 아니라 

오로지 경험하기의 실천을 통해 본바탕 그대로 

고스란히 느끼는 일이다. 

 

거기에 ‘삶의 의미는 이렇다’라든가 

‘존재의 이치는 저러하다’는 등의 이론이 개입되지 않는다.  



이처럼 온전한 경험은 

내가 ‘나’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나게 만든다. 



다만 놀라운 것은 

내가 ‘나’에 집착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주관도 객관도 사라진다는 점이다. 

주객의 분별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모든 관념과 생각 또한 사라지게 된다. 

 

 

제자 : 스님께선 오래된 옛 연못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조주 : 물맛이 아주 쓰다.

제자 : 물을 마시는 사람에게는요?

조주 : 죽지. 

 

   「古尊宿語錄」 趙州眞際禪師語錄幷行狀



오래된 연못이란 모든 존재의 본성이 처음부터 온전하다는 비유로 끌어다 쓴 말이며, 쓰디쓴 맛이란 그것을 깨닫기란 매우 어렵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깨달음 즉 본래의 온전함으로 돌아가는 과정에는 마음의 훈련도 필요하지만 의지와 감정의 훈련도 더해져야 한다. 

 

이를테면 ‘나’를 실체로 생각하는 망상과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이어진다는 암시를 주는 단서가 없어질 때까지 철저한 자기부정을 거쳐야 한다. 인생의 쓴맛 없이는 진정한 기쁨을 모르듯이, 



철저히 죽어야 철저히 산다. 



이처럼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은 엄격한 자기 훈련을 통해 철저하게 자유를 탐구하는 방법이지만, 그것을 무엇이라고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오로지 하루하루의 일상 속에서 온전하게 느끼기의 경험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깨달음이란 밖이나 안에서 구해지거나 이상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일상에서 드러날 뿐이므로 매순간마다 자신에게 충실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실천을 지속하기 힘든 것은 엄격한 자기수련이나 깨달음을 이해하지 못해서만은 아니다. 

 

중국의 유명한 선승 혜능이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청정해져야 한다는 미묘한 의무감에 대해 경고하고 있듯이, 청정해야 한다는 형식만을 강조하면 내면의 활성화는 억눌리게 된다. 내면이 활성화되지 않는 외적인 수행이란 무의미한 수련일 뿐이다. 이를테면 




깨어 있는 정신이 없이 

육신만을 괴롭히는 실천이란 

진정한 수행이 아니다. 



 

회양이 좌선을 하고 있는 도일에게 물었다. 

‘그대는 무엇 하려 좌선을 하는가?’ 

‘부처가 되려 합니다.’

이에 회양이 벽돌 하나를 가져와서 바위 위에 갈았다. 

도일이 이를 보고 물었다. 

‘스님, 무얼 하시렵니까?’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벽돌을 간다고 어찌 거울이 되겠습니까?’

‘좌선을 한들 어찌 부처를 이루겠는가.’

‘그럼 어찌 해야 하겠습니까?’

 

‘소가 수레를 몰고 가는데 수레가 가지 않으면 바퀴를 때려야 하겠는가, 소를 때려야 하겠는가?’

도일이 대답이 없으니 회양이 다시 말했다.



‘그대는 좌선을 배우는가? 

 아니면 앉은 부처를 배우는가? 

 만일 좌선을 배운다면 좌선은 앉고 눕는 데 있지 않고, 

 만일 앉은 부처를 배운다면 부처는 일정한 형상이 아니다. 

 머무를 곳이 없는 법에 대하여 

 취하고 버리려는 생각을 내지 말라. 

 그대가 만일 앉은 부처가 된다면 

 그것은 부처를 죽이는 일이요, 

 앉는 상에 집착된다면 그 이치를 통달하지 못한다.’ 

 

                「傳燈錄」 南嶽懷讓

 

 

꽃은 아름답지만 아쉽게도 너무 빨리 떨어지고, 잡초는 짜증스러운데도 매일매일 무성하게 자란다. 꽃이 시들어 떨어질 때 애석한 마음이 들고 잡초가 무성하게 자랄 때 싫은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내면은 닫혀 있을 뿐이다. 

 

달리 말하자면 




매일매일 변하는 현상이야말로 

가장 생생하고 구체적인 현실이다. 

매일매일이 곧 창조의 새벽이며, 

하루하루가 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는 날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에 눈을 뜨지 못한다면 

수행이란 단지 육신을 괴롭히는 형식일 뿐이다. 




우리의 일상은 온전함으로 펼쳐지지만, 온전함을 또 다른 이미지로 상상한다는 것 역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 이를테면 수업을 열심히 듣는 학생은 ‘나는 졸지 않고 열심히 수업을 듣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수업을 들을 뿐이다. 그러나 ‘수업을 열심히 듣고 있다’고 의식하는 것은 수업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바로 여기에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최소한의 노력이 필요하게 된다. 

 

석공혜장(石鞏慧藏)이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스승 마조(馬祖)가 지나가다가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석공 : 소를 먹이고 있습니다. 

마조 : 어떻게 소를 먹이나?

석공 : 그놈이 채소밭으로 가려고 하면 사정없이 

          고삐를 잡아당깁니다. 

 

      「傳燈錄」 石鞏慧藏

 

 

비록 내면이 깨어 있더라도 

끊임없이 내달리는 욕망과 감정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감정이 일어날 때마다 사정없이 고삐를 당겨 자신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수 없다면, 그것은 적에게 내 영토를 맡긴 것과 같다. ‘기분이 좋아지면’이란 말을 앞세워 일일이 자기 기분의 좋고 나쁨을 살핀다면, 그 사람은 기분의 노예일 뿐이다. 

 

감정이란 상대적인 것이며, 주어진 상황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가 안고 있는 수많은 감정적인 문제들 역시 실재하는 사실이 아니다. 감정이란 만들어진 것이며, 자기중심적 관념들이나 견해에 의해 시작된 문제일 뿐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나누고 분류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문제가 되지만, 실제로 무엇인가를 나눈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욕망을 통제할 수 있는 노력 역시 뒤따라야 하지만, 욕망을 통제한다는 것은 하늘과 땅을 똑같이 보도록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실용 가치를 궁극 가치로 착각하게 되면, 

스스로 고통과 괴로움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온전하게 경험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엇을 새롭게 고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있는 그대로’ 보려는 것이다. 저마다의 색안경을 끼고 보는 세상이 보통 사람들의 세상이라면, 색안경을 벗는 일이 곧 온전하게 경험한다는 뜻이다. 



철저하게 자신의 입장을 보고, 

색안경을 벗는 일에 모든 힘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당신은 누구인가?’라고 묻듯이, 

지금 자신을 향하여 ‘나는 무엇인가?’라고 반문하는 일이다. 

 

 

내가 남보다 못하다고 자학하는 일을 멈추어라. 

나보다 못한 사람이 오히려 더 많다. 

내가 남보다 낫다고 잘난 체하는 일도 멈추어라. 

나보다 더 잘난 이가 오히려 많다. 

 

                鄭瑄, 「昨非庵日纂」

                정선   작비암일찬



자신의 삶을 고맙게 여길 줄 알고, 또 그것을 느끼며 사는 사람이 가장 아름답게 사는 사람이다. 사는 것이 괴롭다고 느끼는 것은 현재까지 이루어온 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하는 데서 생기는 집착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내게 주어진 삶을 감사하게 여기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산다는 뜻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지만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선禪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다 해도 매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거기에 도달해 있을 것이다. 

 

 

   일상을 여유롭게 만드는 마음의 기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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