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본래 있지 않음,
즉 마치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이원론적인 사고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분별이 아니라 중도적인, 해결이 아닌 ‘해소(解消)’의 관점으로 되돌리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악(惡)이란 선(善)이야말로 완전하다고 믿는 믿음이 스스로 마련한 그림자일 뿐이며, 극락과 천국 또한 각기 다른 종교의 방편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진리를 가르쳐서 깨닫게 한다고 하지만 가르칠 것도 없고 나타낼 수도 없다. 듣는 사람도 그것을 듣는 것도 없고, 들어서 얻을 것도 없다. 가르칠 것도 없고 드러낼 것도 없으므로 가르치지 않는 것이 제일 좋다. 들으려 해도 들을 것도 얻을 것도 없으므로 듣지 않아도 좋다. 모두가 듣기를 원한다면 말할 수도 있지만, 들어도 듣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碧巖錄」 第七十三則
인간존재를 몸과 마음으로 표현한다 하더라도, 몸이거나 마음이거나 간에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이거나 아니면 둘로 이해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단지 변화하는 현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마음 역시 마찬가지다. 마음이 사물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물질의 영역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마음이 물질 이상의 영역에 머무는 것도 아니다.
마음이 사물을 비추지만,
비춘다는 마음의 작용은 대상과 대상이 아닌 것,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있다’ ‘없다’는 말로는 마음을 표현할 수 없다.
무엇이라고 표현해버리면
바로 그것이 ‘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표현할 수 없다’는 말조차 그것을 암시하고 있으니
이 또한 ‘있다’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마음이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을뿐더러
판단과 생각도 없는 오직 순수함 그 자체다.
그것은 이 세계가 모두 사라지더라도
그 사라짐을 알고 있는 모든 것의 근원이자 뿌리다.
우리의 본성 역시 이 마음과 다르지 않으며,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곧 깨달음이다.
본성을 깨닫게 되면
언제 어디서나 자유로운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때 자유로운 경지라는 것 또한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현실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주어진 삶을 온전히 사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좋고 나쁨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드러날 뿐이다.
중국의 위대한 선승 조주(趙州)는 ‘도(道)’를 묻는 제자의 질문에,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덥다’고 했다. 추울 때 춥고 더울 때 더운 것, 그 이상의 현실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느끼지 못한다.
항상 미래에 대한 기대와 상상 속에서 살거나
과거를 돌이키면서 후회하고 그리움에 잠긴다.
언제나 현실을 떠나 있기에
오히려 지금 여기의 삶을 충만하게 누리지 못한다.
겨울에는 더운 여름을 생각하고,
여름에는 추운 겨울을 그리워한다.
심지어 잠을 잘 때도 편안하게 자지 못한다.
잠을 자면서도
이루지 못한 욕망의 찌꺼기를 꿈으로 재현하고 있다.
그래서 ‘오직 인간만이 머리를 둘 데가 없다’고 한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너무 빨리 판단하고 가치를 매긴다. 이를테면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등과 같이 매사를 ‘좋다’ ‘나쁘다’거나 선과 악으로 분별하고 옳고 그름을 따진다. 심지어 보이지 않는 것에까지 내 기준의 잣대로 들이대며 재단한다.
깨달을 법이란 없다.
깨달았다는 법이 사람을 어둡게 한다.
두 다리를 쭉 뻗고 자라.
거짓도 참도 모두 없다.
「傳燈錄」 夾山善會
무엇을 보든지 간에 ‘싫다’ ‘좋다’는 분별을 내려놓고
한 걸음 물러나서 아름다운 경치를 보듯이 받아들이면
무엇보다도 먼저 내가 편안해진다.
내가 편안하고 즐거워지면 내 주변이 즐거워진다.
그렇게 되면 돈이 좀 없어도,
사는 것이 좀 불편해도 즐거울 수 있다.
내가 편안해지면 건강과 행복 또한 저절로 따라온다.
이는 산 속에서 몇십 년의 수행을 끝낸
위대한 수행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항상 이 마음을 지닐 수 있다면
우리는 늘 편안한 행복감에 젖을 것이다.
괴로움이란
무명(無明)으로 인해 나타난 것이기에
깨달음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어리석음이 짙을수록 깨달음도 깊어지지만,
깨닫고 보면 어리석음도 깨달음도 동시에 사라진다.
이것이 참된 깨달음이다.
혜능(慧能)스님의 ‘본래부터 아무것도 있지 않았다(本來無一物)’는 의미 역시 여기에 있다. 여기서 ‘무(無)’란 「반야심경」의 공(空)과 마찬가지로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라,
‘있다’와 ‘하나’를 포함하는 모든 범주와
개념의 너머에 있는 궁극적 실재에 대한
최상의 긍정을 의미한다.
길가에 핀 풀 한 포기, 발길에 차이는 돌멩이 하나에서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 그 자체를 느낄 수 있다면, 이것이 곧 깨달음으로 사는 일이다.
깨달음 일상을 여유롭게 만드는 마음의 기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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