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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몸의 형상이 아닌 몸

몸의 형상 아닌 형상을 보라

  

 

      

 

  경문 |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몸의 형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볼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형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몸의 형상은 곧 몸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해설 |

 

  범부는 오직 색신만 보고 법신을 보지 못하므로

 

  무주상보시를 행하지 못하며

 

  일체 중생을 공경치 못하는 것이다.

 

   

 

여래如來란 진여[如]에서 왔다[來]는 뜻이다. 여如는 진여의 본체로 법신인 지혜의 몸이라 몸의 형상을 떠나 있고, 래來는 진여의 작용인데 두 가지로 나타난다.

 

범부의 위치에서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의 육식六識의 경계로 보기 때문에 법신 여래를 색신으로만 본다. 색신, 곧 모습으로 보기 때문에 



자기 마음 밖에 

부처님이 따로 있다고 잘못 알아서 

진여를 미혹하게 된다.



보살의 지위에서는 

육근이 청정하고 사상이 없이 보기 때문에 

법신여래를 보신報身으로 본다. 

보신이란 한량없는 색色과 상相과 이름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물으시되, “몸의 형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하시니 수보리가 범부와 이승二乘들은 색신으로만 보고 법신을 보지 못하므로 “볼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형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라고 한 것이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몸의 형상은 

곧 몸의 형상이 아니라 했는데 

무엇을 이름 하여 몸의 형상이 아닌 몸이라 하는가?



예를 들어 하나의 모습 없는 모습인 본체[法身]가 자식을 만나면 어머니로 나투고, 남편을 만나면 아내로 나투고, 어머니를 만나면 딸로 나투는 등 갖가지 모습으로 나툴 때 

 

색신은 한 모습이지만 

모두 하나하나 상 아닌 상으로 상황 따라 

분명히 다르게 나투는 것이 원만하여 보신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은 이미 법신과 보신과 화신을 갖추고 자유자재하나 스스로 미혹하여 색신에 취착取着하는 까닭에 법신여래를 볼 수 없다 한 것이다.

 

   

 

  야부 |

 

  또 일러라. 지금의 행주좌와는 이 무슨 상相인가? 졸지 말지어다.

 

   

 

  해설 |

 

몸의 형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다 하니 이 형상을 떠나서 따로 법신이 존재하는 줄 잘못 알면 이 또한 삿된 소견에 떨어진다. 법신은 광명인데 광명은 비추는 성질이 있어서 일체를 비추어 나투게 한다. 비추어서 나투게 되는 것을 범부와 법에 치우친 견해를 가진 이승二乘은 색신으로 보고, 보살의 경지에서는 보신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비추는 놈과 비추어지는 놈이 따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어서, 시방 세계에 항상 계신 부처님[常身法身]을 보고자 하면 행주좌와 처를 향해 간파하여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을 떠나 법신을 따로 구하지 말라 하는 까닭에 ‘졸지 말지어다’라고 하였다.

 

  

 

  야부 |

 

  몸이 바다 가운데 있으면서 물을 찾지 말고

 

  매일 산 위를 거닐면서 산을 찾지 말지어다.

 

  꾀꼬리 울음과 제비 지저귐이 서로 비슷하니

 

  전삼前三과 더불어 후삼後三을 묻지 말지어다.

 

   

 

  해설 |

 

  이 몸 그대로가 법신의 나툼이고,

 

  우리의 삶 그대로가 보리의 행인데

 

  꾀꼬리의 울음과 제비의 지저귐이

 

  어디로부터 나왔는가를 알게 되면

 

  천 가지 만 가지 차별을 묻지 않게 된다.

 

 

 

     그대 삶이 경전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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