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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나는 존재하지 않는 헛깨비

나 하늘로 돌아가리

 

 

 

제가 잘 알고 있는 보살님의 남편 부고를 들었습니다. 그동안 아주 건강했는데 급성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한지 3일 만에 세상을 허망하게 떠났다는 것이었습니다. 듣는 사람도 이렇게 허망할진대 그 가족들이야 어떤 마음일까, 생각하니 답답한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식에 이어 10년 동안 아이가 없어 고생하다가 겨우 임신에 성공했다는 기쁨에 들떠있는 임산부의 이야기를 같은 장소에서 들었습니다. 한 사람은 이제 60세를 갓 넘긴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인의 부고를 전하며 가슴 아파했고, 한사람은 임신의 기쁨을 전했습니다.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방향에 따라 “안됐다”라고 혀를 차다가도 “참, 잘됐다”라고 또 기뻐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사람들은 두 이야기를 잊은 채 또 다른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삶과 죽음이 하나의 일상이라는 듯이.



저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서, 먹고, 자고, 일하다, 죽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 태어남과 죽음이 남의 일인 경우에는 크게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남의 인생은 내 인생에 비하여 단순하고 힘들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만약 남의 인생을 보듯 

나의 인생을 살아간다면 

삶이 그렇게 팍팍하고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도 그렇게 남 보듯이 

그냥 일상처럼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렇게 두려운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삶과 죽음이 내 입장이 되었을 때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나의 죽음이 두려운 것은 

거기에는 ‘남’이 아니라 ‘나’가 있게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는 수행도 남을 위한 수행이 아니라 나를 위한 수행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생사를 초월’하고자 하는 수행도 ‘나’를 없애는데 초점이 맞춰 줘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없다면 나의 죽음도 남 보듯이 볼 수 있을 것 같고, 

내가 없기에 욕심도, 성냄도, 남과의 비교도 분별도 없고, 

더 나아가 삶도 없고, 죽음도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 때문에 괴롭고 ‘나’ 때문에 삶이 힘들기 때문에 수행자들은 ‘나’를 없애기 위해 오늘도 방 한구석에 그 힘든 수행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를 없애려고 해서 

‘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원래부터 ‘나’가 없다는 것입니다. 

원래 ‘나’가 없는데 ‘나’가 있다고 착각을 해서 사는 삶이 

바로 우리 중생들의 삶입니다. 

 

‘나’가 없기 때문에 ‘남’도 없고, 

‘남’도 없기 때문에 ‘우리’도 없고 

‘우리’도 없기 때문에 세상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있다고 착각하고 살기 때문에 

세상도 있고 괴로움도 있고 생사가 있습니다.

 

불교의 입장으로 보면 내가 없기 때문에 생(生)과 사(死)란 원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인연따라 움직이기에 생과 사는 하나의 변화일 뿐, 새로 태어남도 없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죽음도 없습니다. 

 

인연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매일, 매 순간, 매 찰나에 죽었다, 살아났다 합니다. 

한 생각 일어남이 생(生)이고, 

한 생각 사라짐이 사(死)입니다.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 같지만 

단 몇 초 만에 살다 사라지는 미생물에 비한다면 

아주 긴 시간입니다.

 

또한 인생이라는 것도 저 엄청난 우주의 시간에 비한다면 찰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주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삶은 죽음도 없고 삶도 없습니다. 그저 잠시의 변화가 있었을 뿐입니다. 

 

더 크게 보면 변화도 없습니다. 달에서 태평양의 거대한 파도를 보면 태평양의 파도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 그저 파란색의 모습으로 보일 것입니다. 부동의 모습입니다. 

 

하루의 일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하루도 수많은 생명이 태어나고, 또 수많은 생명이 죽고, 수많은 일들이 이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하루해는 아무런 일도 없듯이 여전히 뜨고 또 지고 맙니다. 그야말로 부동입니다. 

 

태어남도 없었고, 

또 사라짐도 없었습니다. 

어제처럼 해는 뜨고 지고, 

내일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넓디 넒은 바다에 수많은 파도들이 출렁거리고 있지만 바다는 줄지도 늘어나지도 않고 오늘도 여여합니다. 

 

그야말로 무생입니다. 태어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습니다. 따라서 삶과 죽음이 없고, 옳고 그름도 없고 선과 악도 없고, 그저 부동입니다. 오늘 태어나고 사라지는 이 현상들은 다 헛깨비 들입니다. 

 

어느 선사님 말씀처럼 그림자이고 메아리입니다. 업식에 따라 나타난 허공 속에 핀 꽃들입니다. 공화(空華)입니다

 

사자의 그림과 토끼의 그림 중에서 무엇이 무섭습니까? 혹시 사자의 그림이 더 무섭다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림은 그림일 뿐입니다. 

 

영화 속에서 아무리 총을 쏘고, 원자 폭탄이 투하되어도 스크린은 상하지 않습니다. 영화가 끝나면 스크린은 멀쩡합니다. 그와 같이 




우리의 삶도 

그림자이며 영화일 뿐입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헛깨비입니다. 

 

따라서 생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있는 것은 변하지 않는 부동의 참 자아 일뿐입니다. 참 자아는 생사가 없으므로 편안합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는다면 

 

삶이 괴로움이 아니라, 

삶은 즐겁고 안락한 것입니다. 

영화를 보듯이 삶을 즐기기만 하면 됩니다. 

공포영화도 영화라고 생각하면 재미있게 감상할 수가 있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천상병 귀천-



    흔들림 속에 고요함이 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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