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다는 것에 대하여
야부 |
문聞이여,
간절히 경계를 따라가지 말지어다.
해설 |
알아차리고 지켜보는 마음이야말로
모든 부처님과 하나 되는 통로이다.
야부 스님께서 우리들을 가르치기 위해 얼마나 절실하셨으면 ‘간절히 경계를 따라가지 말라’고 하셨을까. 부모가 자식 잘 되기를 원하여 매일 아침마다 차 조심해라,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 좋은 친구 사귀어라, 불량식품 먹지 말라고 당부하듯이 스님 역시 우리 뒤를 쫓아다니며 가르치고 계신다.
듣는다는 뜻의 한자 문聞은 중국에서는 문향聞香이라고 해서 향기를 맡는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듣고 냄새 맡음이 같은 글자인 것은 듣는 기관과 냄새 맡는 기관이 갈라져 있으면서도 일치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눈ㆍ귀ㆍ코는 다 갈라져 있으면서도 합쳐져 있다. 그래서 듣는다는 것은 본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그런데 우리 신체구조를 그려 보라는 것은 하나의 비유일 뿐, 이 도리를 확장하면 감촉으로 느끼고 의식으로 분별하는 것도 모두 한 작용이다.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은 갈라져 있으되 사실은 하나의 다른 모습이다. 오감은 모두 이름만 바꾸어 나타날 뿐 갈라져 있으면서도 통합적이다.
우리는
온몸으로 듣고
온몸으로 보고
온몸으로 냄새 맡고
온몸으로 느끼고
온몸으로 판단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 말이다. 무슨 뜻인가? 우리 앞에 나타나는 모든 번뇌는 사실 이름만 다를 뿐 뿌리가 같다.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각양각색의 번뇌, 학업에 대한 번뇌, 사랑에 대한 번뇌, 사업에 대한 번뇌, 자식에 대한 번뇌 등 이른바 팔만 사천 가지로 펼쳐져 있는 가지각색의 번뇌가 사실은 이름만 다를 뿐 뿌리는 같다. 학업에 대한 번뇌가 옷만 바꿔 입고 사랑에 대한 번뇌로 옮겨 갔다가 직장에 대한 번뇌로 옮겨 다니는 것이다.
갖가지 번뇌가 낱낱이 따로따로 있다고 알고 있지만 그 뿌리가 하나임을 놓치고 있다. 갈라져 있으면서도 합쳐져 있는 것, 그러면 그 번뇌의 뿌리는 무엇인가? 바로 참된 나를 돌아보지 않고 경계를 따라다니는 것으로 탐ㆍ진ㆍ치가 근본이 된다. 그래서 ‘간절히 경계를 따라가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보조普照 스님은 『수심결修心訣』에서
「관음이 이치에 들어가는 문을 보임」 편을 통해 이렇게 가르치고 계신다.
“진리에 들어가는 길이 여러 갈래가 있으나 그대에게 하나의 문을 가르쳐주어, 그대로 하여금 근원에 돌아가게 하리라. 그대는 까마귀 우는 소리와 까치의 울음소리를 듣는가?”
“예 듣습니다.”
“그대는 그대의 듣는 성품을 돌이켜 들어보라. 거기에도 여러 가지 소리가 있는가?”
“거기에 들어가서는 어떤 소리도 어떤 분별도 얻을 수 없습니다.”
“기특하다. 이것이 관음보살이 이치에 들어간 문이다.”
관음보살은 관음觀音 즉 세상의 소리를 보시는 분이다. 불교에서 소리를 듣는다고 하지 않고 본다고 한 까닭을 이제 알았을 것이다. 그러면 관세음보살은 어떻게 관세음보살이 되실 수 있었는가? 까마귀 우는 소리, 까치 우는 소리, 즉 각양각색으로 다가오는 경계들을 따라가지 않고 자성으로 돌이키셨기 때문에 관세음보살이 되신 것이다.
마음을 관觀하는 것은 무엇인가?
마음이 마음을 듣고 보는 것이다.
마음이 마음을 온몸으로 챙기는 것이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체 경계,
일체 번뇌의 마음을 또 다른 마음이 놓치지 않고
온몸으로 주시하여 봄으로써 번뇌의 마음을 깨뜨리고
참 나인 진여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다.
세상의 소리[世音]란 나다 너다, 좋다 나쁘다, 사랑한다 미워한다, 잘했다 못했다 하는 일체 존재의 소리이며, 이 일체 존재의 소리를 온몸으로 잘 지켜보고 듣는 것이 바로 관觀하는 것이며, 관을 잘 하는 이가 관세음觀世音으로 화하여 나투게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관세음은 없다.
관세음의 작용(나툼)이 있을 뿐이다.
불교 공부는 하나도 어렵지 않다. 그저 마음을 잘 지켜보면 된다. 마음 지켜보는 것 이외에 더도 덜도 없다. 우리들이 몹시 화를 내고 있을 때에도 순간 ‘아, 내가 너무 화를 내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서럽게 울다가도 ‘너무 많이 울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 득의得意하였을 때에도 지켜보고, 실의失意하였을 때에도 지켜보면 이 세상 어느 경계도 공부 재료 아닌 것이 없게 된다. 그래서 듣는 성품이 공한 까닭에
“거기에 들어가서는 어떤 소리도 어떤 분별도 얻을 수 없소.”라고 하였다.
이 지켜보는 마음이야말로 지혜를 낳고 깨달음을 열게 한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이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라고 하는 것은 지켜보는 작용을 잘 하는 것이 성불成佛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뜻이다. 알아차리고 지켜보는 마음이야말로 모든 부처님과 하나 되는 통로이다.
야부 |
문聞이여, 문聞이여.
원숭이는 고개 위에서 울고, 학은 숲속에서 울도다.
조각구름 바람에 물은 길게 여울져 흐르도다.
가장 좋은 늦가을 서리 내린 한밤에
새끼 기러기 한 소리가 하늘의 차가움을 알리도다.
해설 |
늦가을 서리 내린 한밤에
홀로 우뚝한 한 생각이
하늘의 뜻을 누설한다.
천진하게 걸어가는 선재동자의 발걸음이 여여로워
들음과 설함이 완성되었다
들음의 완성이여,
상대적인 세계가 스러지고 주객이 온전히 하나가 되어 진정한 지음知音이 되면 좋은 소리에 기뻐하고 슬픈 소리에 슬퍼함에 모든 것이 법에 딱 맞는다. 조각구름은 오대산의 청량한 바람으로 인하여 걷히고, 물의 성품은 본래 움직이지 않고 고요한 까닭에 가장 좋은 늦가을 서리 내린 한밤에 홀로 우뚝한 한 생각이 하늘의 뜻을 누설한다. 티끌 하나 없는 대무심의 자리에서 평상심을 자유자재로 쓴다.
설함의 완성이여,
법을 설하는 자는 누구이고 법을 듣는 자는 누구인가? 보통 우리들은 법문을 설하고 법문을 듣는다고 한다. 그러나 설함과 들음이 나누어지면 설함도 있게 되고 들음도 있게 되어 유위법에 머무르니 치우친 소견이 된다.
법을 설하는 자와 법을 듣는 자는
하나의 근원에서 작용한 두 가지이다.
상대적인 나뉨의 세계 둘에 본래성품인 대무심의 자리 하나를 더하면 셋이 온통 평등한 하나가 된다. 이 셋이 곧 하나임을 알게 되면, 상대적인 세계는 스러지고 설해도 설함이 없고 들어도 들음이 없는 무위로 홀로 천진하게 걸어가는 선재동자의 발걸음이 여여로워 들음과 설함이 완성되었다.
선재동자는 누구인가? 눈으로 들을 줄 알고, 귀로 볼 줄 알아야 조금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하듯이 기러기가 끼룩끼룩하고 날아가는 소리를 들으면 밖에 나가보지 않아도 온 하늘이 차가움을 알고, 앞마당에 한 송이 꽃이 핀 것을 보고도 온 천하에 봄이 온 것을 간파해야 공부인(선재동자)이라 할 수 있다.
그대 삶이 경전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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