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초월한 완전함
직선적으로 올라가는 길과 나선상의 전개를 비교해보면 영적 성취에 대한 두 가지의 매우 다른 관념을 발견하게 된다. 직선적인 길은 완성된 인간으로서의 이상적인 모델, 즉 붓다 혹은 성자나 현자를 제시한다.
이 모델 속에서는 모든 탐욕, 분노, 두려움, 분별, 착각, 개인적 에고와 욕망 등이 영원히 뿌리 뽑혀 완전히 제거된다. 남는 것은 절대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찬란한 빛을 발하는 순수한 인간으로, 그는 어떤 어려움도 경험하지 않으며 이 깨달은 성자는 도道, 혹은 신의 뜻만을 따를 뿐 결코 자신의 뜻을 좇지 않는다.
만일 이것이 우리가 품은 이상이라면 동시에 그러한 존재는 매우 희귀하거나, 이 시대의 지구상에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좀 더 순환적인 깨달음의 모델은 정체성 변화에 의한 자유를 제시한다. 이 모델에서도 우리는 진정한 본성을 깨닫고 시간을 초월한 영혼의 자유 속에서 쉬게 된다.
우리는 진정한 실재가
몸과 마음 너머에 있음을 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이 몸과 마음 속에서 살고 있으므로 삶의 일상적인 패턴은 계속될 것이다. 유태교나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의 선지자들, 혹은 세계 토착 문화의 원로들 중에서 깨달은 사람들은 신성함과 동시에 결함이 뒤섞인 인간성을 함께 지닌 복합적인 인물들이다.
하지만 다른 점은, 그들은 과거의 문제들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이 편안하고 해롭지 않은 것으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성자 스리 니사르가닷타Sri Nisargadatta가 말하듯이.
고통과 어려움,
심지어는 성급함과 초조함도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다.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을 것이다……
이 몸과 마음은 조건에 따라 한정되지만,
내 삶은 무시간 속의 영원한 개화이다.
완벽한 이상을 붙잡든, 인간성 속의 자유를 붙잡든 간에 깨달음이란 각각의 전통 속의 각자가 붙들고 씨름해야 할 신비이다. 이 신비의 풀이는 결국 가슴 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반대 극들이 이해되고 융화되어 품어질 수 있는 곳은 바로 이곳이다.
오로지 가슴만이
우리의 완전성과 인간성을 한꺼번에 품을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지도들과 기대를 뒤로하고 가슴을 깨어 있는 의식과 사랑을 향해 열려 있게 해야 한다─거기서 무엇이 오든 간에. 이 깨어난 가슴으로 살면 우리는 모두가 보살이요, 신의 종이 된다. 우리는 깨달음의 경지에 대한 이런저런 주장에 관심을 빼앗기기보다는
모든 존재와 함께 매순간
깨어 있을 것을 다짐해야 한다.
이것은 인내와 자비와 지혜와 관용의 길이며,
지금의 현실 속에서 살고자 하는 의지의 길이다.
오직 여기에서만
자유를 찾아 시간을 초월한 완전함 속에 머물 수 있다.
“엄밀하게 말해서,
깨달은 사람은 없다.
오직 깨달음의 행위만이 있다.”
깨달음을 주장하는 자아가 있다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대신 그는 이렇게 말을 잇는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순간 순간의 깨달음,
깨달음 다음의 또 다른 깨달음에 대해서이다.”
깨달음 이후 빨랫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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