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 인
깨달은 뒤에 닦는 문에서 정(定)과 혜(慧)를 균등히 지니는 이치를 아직도 분명히 알지 못하겠사오니, 다시 설명하시고 자세히 보이셔서 어리석음을 열어 해탈의 문에 들게 하여 주소서.
보 조
만일 법과 이치(法義)를 시설한다면 진리에 들어가는 문이 많겠으나 정혜(定慧: 선정과 지혜) 아닌 것이 없고, 그 강요(綱要)를 취하건대 자기 성품 위의 체(體)와 용(用) 두 가지 뜻이니 전에 말한 바 공적영지(空寂靈知)가 그것이니라.
정(定)은 본체요 혜(慧)는 작용이니,
본체 그대로인 작용이기 때문에 지혜가 선정을 여의지 않았고,
작용 그대로인 본체이기 때문에 선정이 지혜를 여의지 않았으며
선정 그대로가 지혜인 까닭에 고요하면서도 항상 알고,
지혜 그대로가 선정인 까닭에 알면서도 항상 고요하나니,
조계(曺溪: 육조혜능) 화상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 바탕에 어지러움 없는 것이 제 성품의 선정이요, 마음 바탕에 어리석음 없는 것이 제 성품의 지혜이니라”
만일 이와 같은 이치를 깨달아
고요함과 앎에 자유로워서
가리고[遮] 비춤[照]이 둘이 없게 되면
이는 활짝 깨달은 자가
정[定]과 혜[慧]를 쌍으로 닦는 것이 되느니라.
만일 말하기를
“먼저 적적(寂寂: 아주 고요함)으로써 산란[緣慮]을 다스리고,
나중에 성성(惺惺: 또렷또렷함)으로써 혼침[昏住]을 다스려서
선후의 치유(治癒)로 혼침과 산란을 균등하게 조절해서
고요함[靜]에 들어간다”고 한다면
이는 차츰 깨달은 열등한 무리가 행할 바 이니라.
성성과 적적을 균등히 지닌다고는 하나 고요함을 취해 수행을 삼으려는 허물을 면치 못했으니 어찌 일을 마친 사람[了事人]이 본래의 고요함과 본래의 신령스런 지혜를 함께 여의지 않고 자유로이[任運] 쌍으로 닦는 것이라 할 수 있으리오?
그러므로 육조[曹溪]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스스로가 깨닫고 수행하는 것은 다투는데 있지 않나니 앞과 뒤를 다투면 미혹한 사람이니라.”
통달한 사람의 경우에는 선정과 지혜를 균등히 지닌다는 것이 공용(功用: 애써서 노력함)에 속하지 않나니, 원래부터 함이 없기 때문에[無爲] 더 이상 특이한 경우가 없느니라.
빛깔을 보거나 소리를 들을 때에도 그저 그렇게 하고, 옷을 입고 밥을 먹을 때에도 그저 그와 같이 하며, 똥을 누고 오줌을 눌 때에도 그저 그와 같이 하며, 사람을 대하여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그저 그와 같이 하며,
나아가서는 다니거나 멈추거나 앉거나 눕거나 말하거나 잠잠하거나 기뻐하거나 성내거나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항상 그와 같이 하되, 마치 빈 배를 파도 위에 띄우면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것 같으며, 물이 산골을 지날 때 굽을 때도 곧을 때도 있는 것 같아서
마음마다에 아무런 알음알이가 없느니라.
오늘도 훨훨[騰騰] 자유로우며[任運] 내일도 훨훨 자유로워서 뭇 인연에 수순하되 아무런 장애가 없으므로 선과 악에 대하여 닦으려고도 하지 않고 끊으려고도 하지 않으며, 곧고 거짓이 없어 보고 듣는 일에 예사로우니라. 한 티끌도 상대할 것이 없거니 어찌 수고로이 떨어버리는 공부를 할 것이며, 한 생각도 망정(妄情)을 낼 것이 없거니 반연을 잊으려는 힘을 쓸 필요가 없느니라.
그러나 장애가 진하고 습기가 무거우며 살핌[觀]이 미약하고 마음이 들떠서 무명의 힘은 크나 반야의 힘은 작으므로 선과 악의 경계에 대하여 시끄럽거나 고요함에 끄달리지 않을 수 없어 마음이 편안치 않은 이에게는 반연을 잊고 떨어버리는 공부가 없지 않으니라.
고인이 이르되 “육근(六根)이 경계를 거두어 마음이 반연을 따르지 않는 것을 선정이라 하고, 마음과 경계가 모두 공하여 의혹 없이 밝게 비추는 것을 지혜라 한다” 하였느니라
이것이 비록 수상문(隨相門)의 정과 혜이며, 차츰 닦는 문중[漸門]의 낮은 근기들이 행할 바이나 다스려 나아가는 문중(對治門)에는 없어서는 안 되느니라.
만일 도거(掉擧: 산란)가 성하거든 먼저 선정의 문으로 이치에 맞게 산란을 거두어서 마음이 반연을 따르지 않고 본래의 고요함에 계합하도록 하며, 만일 혼침(昏沈: 졸음)이 너무 많거든 다음엔 지혜의 문으로써 법을 택하여 공(空)을 관함으로써 미혹함이 없이 본래의 지혜(本知)에 계합토록 비춰보아야 하느니라.
선정으로써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리고 지혜[慧]로써 무기(無記)를 다스려 시끄럽고 고요함을 모두 잊어 물리치는 공부가 끝나면 경계를 대하되 생각마다 조종(祖宗)에 돌아가고 반연을 만나되 마음마다 도에 계합해서
자유로이 쌍으로 닦아야 바야흐로 일 없는 사람(無事人)이라 불리우니, 능히 이와 같이 하면 참으로 선정과 지혜를 균등히 지니어 불성을 분명히 본 사람이라 하리라.
보조국사 수심결 중에서
'선문禪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슴이 깨어나면 (0) | 2020.06.29 |
---|---|
존재하는 기쁨 (0) | 2020.06.28 |
삶을 통제하려는 환상 (0) | 2020.06.26 |
성품을 통달하면 (0) | 2020.06.25 |
본래 무일물입니다. (0) | 2020.06.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