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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가슴이 깨어나면

가슴이 깨어나면

깨닫기 전에는 우리의 기쁨은 이 땅의 것들을 사용하는 데 있다. 깨달음의 은총을 받은 후에는 이 땅의 것들을 섬기는 데에 기쁨이 있다. 

 

지혜가 자랄수록 삶은 더욱더 창조적인 행위, 봉사하는 행위가 된다. 여기에는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다는 데에 그 아름다움이 있다. 

 

발리 섬의 전통 문화에는 ‘예술가’라는 말도 없고 ‘창조적인’ 사람들도 따로 없으며, 봉사하는 사람과 봉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개념도 없다고 한다. 각자가 자신의 독특한 재능을 바쳐야 하며 모든 행위가 신께 바쳐진다. 

 

신성한 음악과 춤과 그림과 노래와 이야기와 신비적인 황홀경과 기도가, 식사를 준비하는 행위와 수확하는 일, 수레를 끄는 일과 융합되어 있다. 모든 것의 가치가 환영받으며 모든 존재들이 신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각자가 지구에 줄 선물을 가지고 있다. 즉 생명의 그물망에 우리 자신을 늘 바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바칠 수 있는 작은 기여의 씨앗을 가벼이 여기고, 뭇 생명의 넓은 환경 속에서 그것이 맺을 열매를 인정하지 않는다. 



가슴이 깨어나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행위가 우주 전체에 

그 영향을 두루 미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런 시각은 삶을 변화시켜놓을 수 있다. 한 교훈적인 이야기가 이것을 보여준다. 한 사내가 유럽의 어느 거대한 공사장을 찾아갔다. 거기서는 많은 일꾼들이 근처에 있는 높은 건물을 지어 올리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일은 수백 년 동안 계속되고 있었다. 

 

그가 한 일꾼에게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그는 지친 듯이 대답했다. “내 일은 돌을 반듯하게 다듬어서 갖다주는 일이요.” 사내는 옆의 다른 일꾼에게 가서 또 물어보았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가 대답했다. “나는 돌을 깎는 석공인데, 이 일로 처자식을 먹여 살리고 있소.” 세 번째 일꾼에게 사내가 물어보자 같은 일을 하고 있던 그 일꾼은 즐거운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대성당을 짓고 있소.” 

 

우리가 지구를 하나의 대성당으로 볼 수 있다면, 우리의 눈은 열리어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에서 은밀한 행복을 찾아낼 수 있다. 모든 석공들이 큰 일에 기여하고 있었다. 다른 점은, 그것을 자신이 아느냐 하는 것이다.

 

정치적인 항거를 하든지 학교에서 공부를 하든지 1년 동안 명상을 하든지 아메리카 삼나무 숲에서 1년을 살든지─훔볼트 카운티의 오래된 삼나무 숲의 벌채를 막기 위해 줄리아 ‘버터플라이’ 힐Julia ‘Butterfly’ Hill이라는 젊은 여성이 그랬던 것처럼─우리는 각자의 목소리와 각자의 길을 바쳐야 한다. 

 

우리의 특별한 재능이 아이들을 돌보는 것일 수도 있고 법률, 상업, 음악, 컴퓨터 통신, 혹은 정원 가꾸기일 수도 있다. 벽돌이 어떤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각자의 독특하고 고유한 목소리가 살아 있는 목표와 조화롭게 움직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당을 짓는 자신의 역할을 잊어버리면, 

우리의 삶은 서글퍼진다. 

이런 전망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혼은 시들고 말라버린다. 

아무리 하찮은 일을 하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태도를 선택할 수 있다. 



나는 금문교의 톨게이트에서 통행세 징수원이 샌프란시스코로 들어오는 자동차를 맞이하면서 사람들에게 성 프란체스코의 정신을 일깨워주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우리가 바치는 것이 대단해 보이는 것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시를 쓰는 모든 사람들이 십여 권의 시집을 출판하고 우수 도서 상을 받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물려받은 메마른 땅을 갈아 생계를 유지하는 아시아의 시골 농부도 노래를 흥얼거리며 쟁기질을 할 수 있고 자신의 기도를 모스크에 바칠 수 있으며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의 시를 읊어줄 수도 있다. 그 역시 세상을 바꿔놓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재능은 선조들과 신들과 생명의 창조적 지능으로부터 내려온 축복이다. 가슴을 열어놓으면 우리가 재능을 택하듯이, 재능이 우리를 택할 것이다. 그 시작을 위해서는 오직 귀를 기울이기만 해야 한다. 현대 상업주의 문화의 소란과 탐욕으로부터 자신을 고요히 침묵시키면, 



우리가 할 일을 속삭여주는 

친밀한 목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그 목소리는 우리가 교도소의 정원 가꾸기 사업을 벌여야 할지, 국제 사면 위원회에 편지를 써야 할지, 우는 아이를 달래야 할지, 대성당을 지을 돌을 기부해야 할지를 알려줄 것이다. 그것이 완공되는 것을 생전에는 결코 보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오지브웨이 족 인디언의 속담은 이렇게 우리를 일깨운다. 

 

“때로는 자신이 측은하게 여겨질 때도 있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위대한 바람에 실려 하늘을 가로지른다.”



깨어날 때마다 우리는 자신이 이 위대한 바람, 

거룩한 혼, 도道, 법法, 혹은 

생명의 신성한 강에 실려가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 지구에 속해 있음을 깨닫는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지, 

바로 그 사람으로서 충분하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그곳이 바로 깨달음을 위한 장소이다. 

그곳이 우리가 봉사해야 할 곳이다.



이것을 이해하면 감사와 편안한 느낌이 우러나온다. 땅의 음식과 별이 총총한 밤의 어둠, 우정의 따스함, 예술의 창조성, 계절의 변천, 자비의 힘─이처럼 우리는 너무나 많은 축복을 받았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선물인 지상의 생명을 아끼고 보호하며, 우리 자신을 축복으로서 주어야 한다. 월트 휘트먼의 다음 시처럼.

 

   

 

  이것이 네가 해야 할 일이다. 

 

  땅과 해와 동물을 사랑하고,

 

  부를 경멸하고, 

 

  손을 내미는 모든 이들에게 동전을 주라.

 

  어리석고 미친 짓거리에 항거하라.

 

  너의 소득과 노동을 이웃에 바치고, 폭군을 증오하라.

 

  신에 대해 논쟁하지 말고,

 

  사람들에게 관대하게 대하고 또한 인내하라.

 

  학교나 교회나 책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재검토하라.

 

  네 영혼을 모욕하는 것들을 차버리라.

 

  그러면 네 육신이 위대한 시가 되리라.

 

 

        깨달음 이후 빨랫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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