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못 속에 산이 있다
흔히 화엄경의 핵심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말을 합니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이 일체유심조는 불교의 핵심으로서 화엄경 뿐 만아니라, 대승기신론에서도, 원각경에서도 능엄경에서도, 선불교에서도 모든 우주가 모두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그 ‘마음’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선불교에서는 심즉불(心卽佛)이라 하여 ‘마음이 곧 부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좋아하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기뻐하고, 증오하는 어떤 상황을 마음이라고 말을 합니다. 국어사전에는 마음이란 ’감정이나 생각, 기억 따위가 깃들이거나 생겨나는 곳‘이라고 말을 하고, 영어로는 마음을 mind, heart, thought등으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나타낼 때에는 심장을 상징하거나 가슴을 나타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징적인 의미일 뿐, 우리는 그 마음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또한 그 마음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흔히 선가에서는 이런 현상을 자기 눈으로 자기 눈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마음도 그렇다고 표현합니다.
마음은 볼 수도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마음을 알고 있으며, 마음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알고 있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정신세계사 ‘나는 왜 네가 아니고 나인가’ 라는 책에 인디언 체로키족이 말한 마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책에 나온 것을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할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두개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한다. 마음의 하나는 육신의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것들과 관계된 것이다. 우리는 그 마음을 사용해 먹을 것이나 잠잘 곳, 그리고 그밖에 우리의 육신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얻는 방법을 생각해 낸다.
남녀가 짝을 짓고 아이를 갖는 등의 행위를 하는데도 그 마음이 필요하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생존해 나가려면 당연히 그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일들과 전혀 무관한 또 다른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그것은 바로 영적인 마음, 곧 영혼이라는 것이었다.
만일 우리가 육신의 삶을 담당하는 마음만을 발달시켜 탐욕스럽고 천박한 생각에만 몰두한다면, 또 만일 우리가 항시 그 마음을 통해 남을 공격하고 남에게서 물질적인 이익을 취할 방법을 계산하는 데만 몰두한다면……그렇게 되면 상대적으로 우리의 영적인 마음은 히코리 열매의 크기로 쪼그라들고 말 것이다.
우리의 육신이 죽으면 우리 육신의 삶과 관계된 마음도 함께 소멸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만일 당신이 평생 동안 육신의 마음으로 삶을 이끌었다면 당신에게 남는 것은 히코리 열매만한 영혼뿐일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다른 모든 것이 죽을 때 결국 살아남는 것은 영혼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이 그 다음에 또 다른 육체로 태어날 때 - 모든 인간은 다시 태어나게끔 되어있다 - 당신은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히코리 열매만한 영혼을 갖고 태어난다.
만일 다시 태어나서도 육신의 삶과 관계된 마음이 여전히 당신의 인생을 지배하게 된다면 영혼은 다시 완두콩 크기만큼 쪼그라들어 버리거나 아예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럴 경우 당신은 당신의 영혼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만다.
그 결과 당신은 살아 있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죽은 인간이 된다.
할머니는 우리가 죽은 인간을 손쉽게 가려 낼 수 있다고 하셨다. 죽은 인간들은 눈이 멀었기 때문에 여자를 볼 때도 추잡한 것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타인을 볼 때도 나쁜 것 밖에 볼 줄 모르고, 나무를 볼 때도 아름다움을 잊은 채 목재나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밖에 볼 줄 모르게 된다. 그들은 살아있는 것처럼 세상을 걸어 다니지만 사실은 죽은 인간들이다.
할머니 말씀에 의하면 영혼과 관계된 마음은 근육과 똑같은 성질을 지녔다고 한다. 우리가 그것을 자주 사용하면 할수록 그것은 점점 더 커지고 점점 더 강해진다. 영혼을 크고 강하게 만드는 단 하나의 방법은 그것을 통해 세상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는 자세를 갖는 것뿐이다. 그러나 당신이 언제까지나 육신의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계속하고 탐욕을 버리지 못하는 한 영혼으로 이르는 문은 열리지 않는다.
다행히 당신이 영혼으로 이르는 문을 열었을 경우 이때부터 당신은 이해의 길에 들어서게 되며, 당신이 이해의 길을 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당신의 영혼과 관계된 마음은 점점 커지게 된다.
그리고 당연히 이해와 사랑은 손바닥과 손등처럼 함께 따라가는 것들이다. 그 둘은 다른 것일 수가 없다. 흔히 사람들은 어떤 대상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사랑하는 척하는데, 이런 이율배반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사랑과 이해가 따로일 수가 없다.
불교와 인연이 먼 인디언들의 이야기지만 인간들이 살아오면서 지녀온 지혜는 동서고금을 통해 거의 같은 것 같습니다. 단지 살아온 환경이나 기후, 또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종교가 갈렸을 뿐, 인간이 지니는 지혜는 대부분 비슷한 것 같습니다.
마음에는 두개가 있다는 것, 불교적인 용어로 이야기하면 번뇌와 보리 또는 심생멸이나 심진여와 같은 것으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단지 불교에서는 진여나 불성이나 여래장 같은 것으로 마음을 변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한 것에 비해 인디언 체로키족들은 영혼은 변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비록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이야기하는 불교지만 한편으로 윤회를 말하고 있는 입장에서 보면 귀기울여 볼만한 이야기입니다. 영혼과 관계된 마음은 근육과 같아서 사랑과 이해의 힘을 쓰면 쓸수록 영혼은 커지고 쓰지 않으면 작아진다는 말은 불교에서 이야기 하는 업(業)에 의한 윤회와 같은 맥락의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마음은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스승님들이 가끔 ‘마음을 바라보라’고 하지만 실제로 눈으로 마음을 바라볼 수는 없고, 마음을 바라보라는 말은 사랑하고, 미워하고, 즐거워하고 기쁘고, 슬픈 그 느낌을 알아차리고, 그 느낌에 집중하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느낌으로 알 수 있는 마음은 조금만 신경 쓰면 알 수 있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 뒤에 숨어있는(?) 마음, 즉 다른 말로 표현되는 본성 또는 본래면목, 불성, 여래, 진여, 주인공, 마음자리 등은 참 찾기가 어렵습니다.
이 마음을 찾기 위해 많은 수행자들이 오늘도 선방에 앉아 화두를 챙기거나 ‘마음 챙김’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이 ‘본성’, 또는 ‘본래면목’은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렇게 꼭꼭 숨어서 수행자를 힘들게 하는 것인가?
흔히 그 본성을 선사들은 거울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아주 깨끗한 거울, 그야말로 일체의 티끌도 없는 맑디 맑은 거울처럼 생긴 것이 우리의 본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거울에 무명의 티끌이 묻기 시작하여 깨끗한 거울의 모습은, 거울의 제 기능을 잃고 때가 잔뜩 묻은 모습으로 껌껌하여 아무것도 비출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본래의 마음은 없어지고 좋아하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기뻐하고, 증오하는 일상적인 마음만이 남은 것입니다.
중생들은
본래의 마음을 잊어버리고
그 일상적인 마음만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본래의 마음과 일상의 마음이 전혀 별개의 마음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혜능 선사는 번뇌 즉 보리라고 하여 그 일상의 마음이나 본성은 별개의 마음이 아니라 같은 하나의 마음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번뇌의 마음을 가만히 지켜보면 그 마음의 실체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공(空)입니다. 본성도 텅 빈 공(空)이고, 번뇌도 텅 빈 공입니다. 따라서 번뇌나 본성이나 똑같은 공(空)이기에 번뇌 즉 보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맑은 연못 속에 비치는 산의 모습은 그림자일 뿐입니다. 내 마음속에 담겨진 갖가지 사물들의 모습도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 그림자를 붙들고 우리는 웃고, 울고, 죽네, 사네, 힘드네, 즐겁네, 행복하네, 괴롭네, 아프네,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림자는 생로병사도 없습니다.
그냥 평면적이 그림자일 뿐입니다.
일상적인 마음역시 텅 빈 허공입니다.
깨달음이란 다름 아닌 그 일상적인 마음에서 순일한 허공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도 색(色)이 즉 공(空)이며, 공(空)이 곧 색(色)이라고 했습니다.
일상적인 마음이나 우리의 본래의 마음이나
둘이 아닙니다.
순일한 허공성입니다.
그 순일한 허공성이 우리의 본래마음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우주가 모두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면 마음에 비친 우주는 순일한 허공성입니다. 마치 연못에 비친 산 그림자처럼.
마음이 부처라고 하는 것을 수심결에 보면 추우면 추울 줄 알고, 배고프면 배고픈 줄 알고, 즐거우면 즐거운 줄 아는 것이 불성이라고 했습니다. 순일한 허공성이기에 어떤 인연이 오면 그 인연 따라 춥게, 즐겁게 배고프게 보이는 것입니다.
텅 빈 허공성이기에 빨간 것이 오면 빨갛게 보이고 파란 것이 오면 파랗게 보일 뿐입니다.
깨달은 자는 마음이 불성인 줄 알고, 중생은 그 마음을 업이라고 압니다. 그런데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은 공화(空花)입니다. 우리 눈에 티끌이 들어가면 허공 꽃(空花)이 보입니다.
그 공화를 중생들은 실제 존재 하는 줄 알며,
깨달은 사람은 공화로 앎니다.
따라서 우리의 일상적인 마음속에서 본래면목을 보아야 하며 따로 본성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속에서 부처를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스승들은 깨닫고 보면 깨달을 만하게 없다고 말합니다. 그야말로 한물건도 없으니 그 이상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청정한 연못만이 실체입니다.
연못에 비친 산 그림자는 허공 꽃입니다.
흔들림 속에 고요함이 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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