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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그밖의 모든 것은 환상이다.

수행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깨달음과 열림의 주기 뒤에는 두려움과 위축의 시기가 뒤따른다. 깊은 평화와 새로이 발견된 사랑의 시간은 종종 상실과 닫힘, 두려움, 혹은 배신에 의해 엇갈리다가, 또다시 환희와 평정으로 돌아오곤 한다. 가슴은 신비롭게도 꽃처럼 펼쳤다 오므렸다 하는 성질을 보여준다. 이것이 우리의 본성이다.

 

단지 놀라운 점은, 이 진실이 얼마나 환영받지 못하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체험이, 어떤 위대한 깨달음이, 혹은 충분한 기간의 정진 수행이 우리를 마침내 들어올려서 삶의 거친 손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속세의 몸부림을 초월한 곳으로 데려가주기를 원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이 마음 속 깊이 바라는 소원인 것 같다. 

 

우리는 영적 노력을 통해서 인간적 고통의 상처가 없는 곳으로, 그것을 다시는 겪지 않는 곳으로 갈 수 있다는 어떤 희망에 매달린다. 우리는 어떤 경험이 늘 지속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며, 가슴의 확실한 내맡김이 아니다.

 

지혜로운 항해자들은 정박한 항구가 아무리 아름다울지라도 거기에 영원히 머물 수는 없음을 배운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숨을 참는 것과도 같다. 그것은 자신의 과거로부터 감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한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깨달음은 단지 시작일 뿐, 여행의 첫걸음이다. 그것을 자신의 새로운 정체로 알고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다가는 즉시 탈이 난다.

 

깨달은 후에는 곧 분주한 삶 속으로 돌아가서 여러 해를 살아야 한다. 그때에만 배운 것이 소화된다. 그때에만 온전한 내맡김을 배울 수 있다.

 

심우도의 목동처럼 우리는 깨달음을 완성하기 위해서 저잣거리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산에서 내려오다가, 우리는 자신의 낡은 습관이 편하게 길이 든 옷처럼 얼마나 쉽사리 제자리로 되돌아올 수 있는지를 깨닫고는 놀랄지도 모른다. 크나큰 변화를 겪어 마음이 평화롭고 흔들리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어떤 부분은 되돌아와서 어김없이 우리를 시험할 것이다.

 

삶을 어떻게 대면해야 할지, 가족과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질 수도 있다. 영적 삶을 일상적 존재와 일상적 일에 어떻게 끼워 맞출 수 있을지가 걱정이 될 수도 있다. 달아나서 단순한 은거 생활로, 절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중요한 것이 우리를 세상으로 다시 끌어당긴 것이다. 힘겨운 이행 과정도 그것의 한 부분이다.

 

어느 라마승은 이렇게 회고한다.

집으로 돌아오자 인도와 티베트에서 보낸 12년의 경험은 마치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서구의 가족과 일터로 돌아와서 겪는 문화적 충격 속에서 그 초월적인 경험들의 기억과 가치는 가물가물한 꿈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낡은 습관들이 놀라울 정도로 빨리 돌아왔다. 나는 짜증이 나고 혼란스러워졌다. 몸을 돌보지 않고, 돈과 애인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다. 상태가 나쁠 때는 내가 배운 것이 말짱 도루묵이 된 것이 아닌가 겁이 나기도 했다. 

 

그러다가 나는 지나간 깨달음의 기억 속에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영적 수행이란 바로 지금 하고 있는 그것임이 분명하다. 

 

그밖의 모든 것은 환상이다.

 

   깨달음 이후 빨랫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