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아니다
지금 명동을 지나가는 사람과 태평양 어느 섬에 달려 있는 코코넛 열매와 같을 까요? 틀릴 까요? 라고 묻는다면 아마 묻는 사람을 빤히 쳐다 볼 것입니다. 제정신을 가지지 않고서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당연히 틀리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깨우친 선사들에게 묻는다면 그 답변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마 말도 없이 방망이 30방으로 대답할 것입니다. 이 방망이 속에는 같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법성게 첫 구절에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법과 성이 원융하여 상이 두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이라는 이 한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것을 생활속에서 지혜로서 활용한다면 그는 더 이상 공부가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온 이유를 아는 사람입니다.
법이란 오온의 모든 것을 말 합니다. 만법이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현상계를 나타냅니다. 보고, 듣고 말하고 냄새 맡고, 생각하고 등등 이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것을 말하며, 성(性)이란 근본, 본질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물도 그 근본을 보면 대체로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형성 되어있으며,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사물은 만들어 지기도 합니다. 따라서 모든 사물들은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근본은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너도 없고, 나도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보면 모두 그 근본은 같습니다. 단지 인연 따라 그 모습을 달리 할 뿐입니다. 인연 따라 그때그때 형성되었기에 모든 사물은 자체 성품이 없습니다.
자체 성품이 없기에 공(空)입니다.
근본이 같은 불이(不二)입니다.
세상의 고통의 시작은 남과 비교함에 있습니다. 내가 너 보다 잘 나고, 내가 너보다 못나고, 내가 너보다 높고, 내가 너보다 낮고, 내가 너보다 더 많이 가지고 , 내가 너보다 가진 것 없고, 등등 이런 분별심은 우리를 한없는 고통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불교는 이런 분별심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그 근본이 같기 때문입니다. 공(空)이라는 근본이 같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이유는
공이라는 그 근본을 모르기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인생도 실재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지만
죽고 나면 흔적도 없습니다.
단지 살아있는 자의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입니다.
그 기억이라는 것은 실재가 아닌 환(幻)입니다.
어제 있었던 일은 지금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매순간 순간 생겼다 사라지는 포말처럼 삶 자체가 생겼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삶이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기억이라는 잔상이 마치 필림 한 장 한 장이 이어져 생생한 영화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그렇게 느껴지고 있을 뿐입니다.
삶이란 지나가는 꿈일 뿐입니다.
인생은 꿈의 재질로 만들어진 하나의 환영이자 그림자이자 메아리입니다. 그 꿈은 둘이 아니라 모든 것이 같은 동일재질의 꿈일 뿐입니다. 단지 꿈속에 즐거운 꿈이 있고, 슬픈 꿈이 있고, 화난 꿈이 있고, 기쁜 꿈이 있을 뿐
깨어보면 꿈은 다 똑같은 꿈일 뿐입니다.
따라서 꿈 이라는 본질은 불이(不二)지만 꿈속에 성내고, 기쁘고, 슬픈 것은 또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것은 마치 업에 의해서 인과는 존재하여 차별은 있지만 그 인과라는 것이 꿈속에서 존재하기에 차별이 없는 다 똑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대체로 기쁜 생각을 하고 기쁜 마음으로 살면 꿈도 기쁜 꿈을 꾸지만 일상에서 늘 쫓겨 살면 꿈속에서도 늘 쫓기는 꿈을 꾸고 삽니다. 그렇지만
기쁜 꿈이든 나쁜 꿈이든 꿈일 뿐입니다.
불이(不二)입니다.
임제스님이 삼봉에 갔는데 평화상이 물었다.
“어디에서 왔는가?”
“황벽에서 왔습니다.”
“황벽스님께서는 어떤 가르침을 설했는고?”
“황금의 소가 어제 밤 용광로 불속으로 들어갔는데 지금까지 그 자취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평화상도 말했다.
“가을바람이 옥피리를 부는데 누가 그 노래 소리를 알겠는가?”
“바로 만겁의 관문을 통과해서 맑은 하늘에도 머물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평화상이 말했다.
“그대의 질문은 수준이 높구나!”
“용이 황금빛 봉황새끼를 낳으니 푸른 유리 빛 허공을 뚫고 날아간 것입니다.”
이에 평화상이 말했다.
“자, 앉아서 차나 한잔 들게나.”
진흙소가 물속에 가면 그 형체가 사라지듯
황금소도 용광로에 들어가면 그 자취를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본질을 아는 사람은
본질을 아는 사람들끼리 그들은 서로 통하여
가을바람이 옥피리를 부는 소리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흔들림 속에 고요함이 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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