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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눈을 뜬 사람들의 안목

참다운 성품은 깊고 깊어서 지극히 미묘하니

 

眞性心心極微妙 

진성심심극미묘



 

진실로 “참다운 성품은 깊고 깊어서 지극히 미묘하다.”면 이렇게 말을 시작해도 되겠는가. 그러나 어쩌랴, 수많은 중생들이 의상스님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설사 허물을 뒤집어쓰더라도 자비심이 많은 보살은 그냥 있지를 않는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 일체를 여의었으므로 깨달은 이의 지혜라야 알 바요, 그 밖의 경계가 아니로다.”

 

라고만 하고 보살성인이 조용히 침묵만을 지키고 자신의 인기 관리만 하고 있다면 그것이 무슨 보살인가. 그것이 무슨 화엄행자인가. 설사 똥칠을 하고 흙칠을 하더라도 그 지극히 미묘한 이치를 헐어서 중생들에게 맛을 보여야 할 것이다.

 

만약 대화엄大華嚴의 중중重重하여 다함이 없는 법계를 논할진댄 입술을 거치지 않고서 벌써 설하여 마친 것이며, 교승敎乘에 관계치 않고서 벌써 연설하여 마친 것이다.

 

중중 중중 중중하고 무진 무진 무진한 우주법계란 실로 불가사의하다. 사람의 신체를 중심으로 하여 작은 쪽으로 무한히 작게 세분하여도 그 끝이 없으며, 큰 쪽으로 무한히 확대해 나아가도 또한 그 끝이 없다. 

 

경전에서 2천6백여 년 전에 일찍이 한 방울의 물속에 8만4천의 충이 있다고 하였다. 요즘의 과학으로 우리들 몸속에 1백 조의 세포가 있고 그 낱낱 세포 속에 다시 또 1백 조의 세포가 있어서 무한히 분화되고 복제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 우주과학이 발달하여 얼마나 멀리까지 위성들의 세계가 펼쳐져 있는지를 아는가. 허블망원경으로 수백억 광년 저 멀리까지 무한히 우주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다 보고 있는 시대다. 그래서 지구와 똑같은 자연환경을 지닌 별을 찾기에 과학자들은 혈안이 되어 있다. 이 또한 화엄경에서 설하고 있는 화장장엄세계 그대로다.

 

설사 시냇물 소리로 혀를 삼고, 산색山色으로 몸을 삼으며, 온산하대지로 적멸도량寂滅道場을 삼고, 모든 유정有情과 비정非情으로 대중들의 모임을 삼는다고 하여도 말을 붙일 수 없고 찬양을 다하기 어렵거늘 의상법사가 구멍을 꿰맨 데가 없는 곳에 들어가 억지로 천착穿鑿을 내었으니, 이른바 



“ 그에게 이미 상처가 없다면 더 이상 상처를 내지 말라.”



고 한 것이다. 당송팔대가 중의 한 사람인 소동파蘇東坡거사가 무정설법無情說法의 이치를 깨닫고 지은 시가 있다. 흔히 그의 오도송이라고도한다.

 



     계성변시광장설 溪聲便是廣長舌

     산색기비청정신 山色豈非淸淨身

     야래팔만사천게 夜來八萬四千偈

     타일여하거사인 他日如何擧似人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곧 부처님의 크고 큰 설법이거늘

 

     산천의 아름다운 모습들이 

     어찌 청정법신 부처님이 아니랴.

 

     밤이 되니 

     팔만사천의 게송이나 되는 것을

 

     다른 날 이 이치를 

     어떻게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겠는가

 

 

 

눈을 뜬 사람들의 안목에서 보면 저 드넓은 우주에서부터 산하대지와 산천초목들이 본래 그대로 아무런 탈이 없는 존재이거늘 달리 무슨 입을 놀려 왈가왈부하겠는가.

 

비록 그러나 가르침의 바다가 넓고 깊음이 침묵의 맛에 방해되지 아니하기에 의상법사가 포용[坐寬]하여 걸림 없이 탕탕하게 이르되



“ 법法과 성性이 원융圓融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으니,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래부터 고요하도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 일체를 여의었으니, 깨달은 이의 지혜라야 알바요 그 밖의 경계가 아니로다.”



라고 한 이 네 구절에서 모두다 말해 버린 것이니 붉은 분粉을 바르지 않고도 곧 풍류風流가 있는 기상氣象이다.

 

고인이 승찬대사의 신심명信心銘을 



     지도무난 至道無難 

     유혐간택 唯嫌揀擇 

     단막증애 但莫憎愛 

     통연명백 洞然明白



이라는 네 구절에서 모두다 말해 버렸으며 그 이하는 모두가 네 구절의 주석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설잠스님은 법성게가 앞의 네 구절에서 하고자 하는 뜻을 다 말해 버렸고 나머지는 화장이며 장엄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무비스님이 풀어 쓴 

    김시습의 법성게 선해禪解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