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無이자 모든 것 : 공空의 문
우리는 사물의 겉모습과 환영 속에서 산다. 실재가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모른다. 이것을 이해하면 우리는 자신이 무無임을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무가 됨으로써 모든 것이 된다. 그것뿐이다.
- 칼루 린포체 Kalu Rinpoche -
우리 삶의 기쁨과 슬픔은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 창조의 근원이 인격화하면 그것은 알라, 브라마, 또는 하나님과 같은 이름을 얻게 된다. 신성한 근원은 또한 인격화하지 않고도 경험할 수 있다. 이 근원을 묘사하는 신비주의자나 명상가들은 신성한 비어 있음, ‘위대한 공空’으로부터 우주가 탄생하는 것을 본다. 유태교 신비주의자들은 이것을 이렇게 묘사한다.
신은 허공으로부터 세상을 지어냈다.
세상은 오직 신의 가슴 안에 존재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알려면
우리는 다시 무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러면 신성한 의지가 우리를 통해 움직이고
우리의 모든 행위를 비출 것이다.
‘무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비어 있음이나 무아無我의 상태를 이해하려면 혼란스러워진다. 물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물고기는 그것을 설명하기가 힘들듯이, 그것은 설명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것의 진실을 경험하면 우리는 놀라운 환희와 평화 속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르네상스 시대의 기독교 신비주의자였던 앙겔루스 실레시우스Angelus Silesius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신은 사랑과 기쁨으로 모든 곳에 계시지만
그대가 거기에 있지 않으면
찾아오실 수가 없다.
‘죽음의 신’은 나치케타에게 거울을 주면서, 거울 속에서 그의 존재의 근원을 찾아내라고 한다. 이 탐구의 밑바닥에서, 명상가는 비어 있음의 경험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비어 있음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다. 즉
자아의 비어 있음과
허공의 비어 있음이다.
자아의 비어 있음은 우리가 고정 불변하다고 생각하는 ‘자아’를 통제할 수가 없다는 사실에서 맨 먼저 드러난다. 명상이나 기도 등을 통해 내면을 향하게 되면 누구나 곧, 끊임없이 변하는 마음과 끝없는 감정과 기분의 파문이 매 순간을 물들이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이 생각과 감정의 물결은 자신의 삶을 가지고 있다. 그 안에는 우리의 어린 시절과 다사다난했던 청년기의 경험들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어서, 그것들은 나타나서 우리의 주의를 끌어당기다가는 어느새 사라진다.
우리는 이런 생각과 감정과 몸의 감각 등의 총합을 자신이라고 간주하지만, 거기에는 고정 불변한 것이 없다. 생각과 의견과 감정과 몸이 한시도 가만있지 않고 시시각각 변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나의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차라리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그것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인식 공간을 아는 그것은
누구인지를 볼 수는 있다.
명상 속에서는, 모든 것을 ‘나의 경험’이라고 무의식적으로 뭉뚱그려버리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나서, 좀더 고요하고 덜 소유적인 관찰 행위로 주의를 돌릴 수 있다.
이 고요한 관찰을 통해 우리는
공空의 첫 번째 측면인 소위 무아,
혹은 에고가 없는 상태를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을 분리되고 고정된 존재라고 느끼던
평소의 인식이 단지 마음이 지어낸
이미지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는 것이다.
20년 동안 티베트 불교의 승려로 살아온 한 서양인은 1960년대에 자신의 스승 라마 예셰Yeshe를 처음 만났는데, 당시에 그는 성공한 영화 제작자이자 TV 프로듀서였다. 인사를 나눈 후에 라마 예셰는 자신의 제자가 될 이 서양인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는 웃음을 터뜨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 TV 드라마나 영화를 만든다구? 난 훌륭한 배우야. 최고의 배우라구! 난 뭐든 될 수 있어, 왜냐하면 난 비어 있기 때문이야. 난 아무 것도 아니라구.”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또 웃음을 터뜨렸다.
시인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도 이에 대한 우리의 직관적인 예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아무도 아니다! 너는 누구냐?
너도─아무도─아니냐?
무아에 대한 이런 알쏭달쏭한 묘사들은 대체 무엇을 말하자는 것일까? 한 명상가는 자아의 비어 있음에 대한 체험이 자신의 영적 삶에 매우 의미심장한 경험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인도 전역을 다니면서 라마승들과 스승들을 만나며 수행했다. 아시아에서 여러 해를 머문 뒤 돌아와서도 그녀는 여전히 날마다 규칙적으로 명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산에서 살면서 날이 밝기도 전에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날마다 고요히 앉아 있었다. 그때 가장 놀랍고도 끔찍한 체험이 찾아왔다. 내가 사라진 것이다. 나였던 모든 것이 씻겨 없어져버렸다. 처음에 나는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랐다.
거기에 이름을 붙일 수가 없었다.
심지어 ‘열반’이라고도 부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름 이전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더없는 행복이었다.
나는 내 몸과 마음이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것은 우주의 것이었다.
자아의 비어 있음 속에서 우주는 투명해지고 명료하고 단순해진다. 분리된 자아의 느낌은 진실이 아님을 깨닫는다. 내가 누구라는 일상적인 자아의 느낌은 고요와 평화 속으로 사라지고 존재의 순수한 경험만이, 그 경험을 소유할 누구도 없는 가운데 경험된다.
자아의 비어 있음이 인식되면서 우리는 공의 두 번째 측면을 이해하게 되는데, 그것은 모든 현상의 비어 있음이다.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눈 있는 자가 갠지스 강에 떠 있는 물거품을 본다고 하자. 그리고 그것을 잘 관찰하다가 그 거품 하나 하나가 모두 비어 있으며, 실재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고 하자. 그와 똑같이 우리도 감각의 인상, 인식, 느낌, 생각,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을 잘 살펴보면, 그것이 비어 있으며 공허하며 자아가 없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다.
자아의 비어 있음을 깨달으면 우리는 공 자체를, 그로부터 모든 것이 태어나는 역동적인 공을 경험하게 된다. 불교 전통에서는 공 속으로 깨어나는 것이야말로 ‘열반’으로 통하는 문이다. 그것은 가슴의 해방이며, 또한 그것은
‘태어나지 않은 자’,
‘창조되지 않은 자’,
‘조건지어지지 않은 자’
라고 부른다.
이 문을 통과한 예들은 예로부터 수많은 신비주의자들에 의해 전해져왔다. 이 문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가장 흔한 세 가지 방법은
명상,
깨어난 이와의 만남,
그리고 자신이 투명해질 정도로 깊은 고독 속에 몰입하는 것을 들 수 있다.
깨달음 이후 빨랫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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