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일체고액 度一切苦厄
조견오온개공의 다음에 등장하는 문장이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다.
도일체고액은
현장(602-664)과 구마라습(344~413)의
번역본에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시었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에드워드 콘체나 쥬이오 이나가키가 번역한
영어심경에는 도일체고액을 찾아볼 수 없다.
심경을 영어로 번역한 이 두 사람은
산스크리스트어 원본에 없는 도일체고액을
번역해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구마라습이나 현장과는
다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근거가 된다.
인도인으로서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구마라습과
손오공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서유기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삼정법사 현장은
심경을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도일체고액을
의도적으로 첨가한 것이다.
구마라습은 인도 사람이었고
산스크리스트어를 잘 알고 있었으며
중국인보다 한문에 능통했다는 천재로서
도일체고액이
심경의 원본에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구마라습보다 약 250년 후의 사람인 현장도
약 15년을 인도에 머물며 공부한 사람으로서
산스크리스트어로 된 심경과
구마라습의 번역본등 다양한 자료를
비교하고 검토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심경의 원본에
도일체고액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했을 것이다.
원본에도 없다는 도일체고액이
구마라습과 현장의 한문번역본에
모두 들어 있는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觀世音菩薩 行深般若波羅蜜時 照見五陰空
度一切苦厄 : 구마라습(鳩摩羅什; 344~413)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 현장(玄奬;602-664)
구마라습이나 현장이 활동하고 있었던
1500-17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은
공도 아니고 무아도 아니다.
우리와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가장 소원하는 것은
잘 먹고 잘 살다가 잘 사는 자손을 남겨놓고
고통없이 죽는 것이고
죽은 후에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모습으로
환생하거나 아니면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천국으로 가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이다.
불노장생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주어진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만이라도
모진 고생하며 살게 되지 않기를
간절하게 기도하는 마음을
누구나 가지게 되는 것이다.
구마라습과 같은 천재가
원본에도 없는 이 구절을 추가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직 불교의 기본도 모르는
중국 사람들에게 아무리 친절하게
공을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이 낯설고 까다로운 지혜의 말씀을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차라리 공을 깨우치기만 하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중국인들의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현상세계를 움직이는
마야의 힘(Leela of Maya.幻影)이기
때문인 것이다.
몸과 마음을 나의 실체로 동일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원죄이며
마야의 유희이다.
그리고 그 거짓된 관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해방이요 해탈이며 구원이다.
그렇다면 자유란
세상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나라는 관념으로부터의 자유이다.
무엇때문에
마야의 유희가 작동해야하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공은
상대가 끊어진 절대적 상태이므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인식이 가능해지려면
본래 하나인
절대적 상태 인식의 주체인 나와
인식의 대상인 너로
나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마음의 창을 통하여 바라보는
언어적인 설명일 뿐이다.
왜냐하면 우주는
자유로운 어떤 원리의 나툼이자
표현이기 때문이며
그 안에 있는 그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하라지는
우주가 이대로 존재하는 것은
우주가 이대로 존재하기 때문이다라는
무원인적인 것으로서의
우주의 존재성을 설명한다.
무원인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다 원인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공의 지혜를 깨우친다는 것은
그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과학적인 분석을 통하여
공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없다.
과학은 오직 보이는 것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지의 경계를
조금씩 밀어내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개체로써의
행복과 구원을 기도하지만
내가 누군인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나의 행복과 구원을 기도한다는 것은
그다지 지혜로운 일은 아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비로소 나를 위한 기도가 가능해진다.
하지만 평범한 일반인들에게
공과 무아를 이야기하는 것은
여전히 부질없는 일이다.
누구도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령 누군가
그 이야기를 들어준다고 해도
공과 무아에 대한 내용을
개념으로나마 이해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과 무아를 이야기하다 보면
중도.사성제.팔정도.삼법인.육파라밀.연기 등이
함께 나타난다.
현기증이 날만도 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인식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공이라는
뜨거운 난로 위에 떨어지는 눈처럼 녹아버린다.
시詩,반야심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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