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선은 사람들에게 좋은 것이다. 내 경험에 따르면, 20분이든 45분이든 매일 고요히 앉아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다. 더 오래 앉아 있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 하루에 한 시간씩 앉아 있고 싶을 수도 있고, 하루에 두 시간씩 앉아 있고 싶을 수도 있다. 그것은 당신이 얼마나 길게 하고 싶은지에 달려 있다. 머리가 하고 싶은 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하고 싶은 대로 따르면 된다.
그런데 내가 말하는 명상은 단지 특정한 자세로 앉아서 행하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명상은
살면서, 생활하면서 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앉아 있을 때만 명상하는 법을 배운다면, 앉아 있을 때 아무리 깊은 명상을 한다고 해도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루에 세 시간씩 앉아서 명상을 한다 해도, 앉아 있지 않는 나머지 시간이 하루에 스물한 시간이나 된다. 만약 하루에 2분 동안 앉아서 명상을 한다면, 앉아 있지 않는 나머지 시간은 굉장히 많아진다.
오랜 세월 내가 목격한 것은, 아주 뛰어난 명상가들조차 방석에서 일어나는 순간 명상을 떠나 버린다는 점이다. 그들은 명상을 하는 동안에는 자기의 관념과 믿음들, 견해와 판단들을 놓아 버릴 수 있다. 그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명상을 아주 잘할 수 있다. 하지만 방석을 떠나기만 하면 그들은 그 모든 것을 다시 되찾아야 할 것처럼 느낀다.
참된 명상은
사실 우리와 늘 함께하는 어떤 것이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참된 명상을 할 수 있다.
자동차를 운전하면서도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허용할 수 있다. 이를테면 교통정체까지도 있는 그대로 허용하는 수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대로 느끼도록 놓아두는 수행을 할 수 있다.
날씨를 있는 그대로 놓아둘 수 있다.
아니면,
다음에 친구나 애인을 만날 때 있는 그대로 놓아두는 것을 실험해 볼 수 있다.
‘내가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완전히 허용하면서 만나면
어떻게 될까?
내가 나를 있는 그대로
완전히 허용하면 어떻게 될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우리의 관계는 어떨까?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변할까?’
따라서 참된 명상은
매우 적극적인 명상,
깊이 참여하는 명상일 수 있다.
명상은
조용한 곳에 앉아 있을 때에만
일어나는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여기면 영성과 우리의 일상생활은 둘로 분리된 별개의 것이 된다. ‘나의 영적인 삶’이라는 것이 따로 있고, ‘나의 일상생활’이라는 것이 따로 있다는 것, 그것이 가장 근본적인 착각이다.
실재에 눈을 뜨게 되면,
우리는 그것들이
모두 하나라는 것을 발견한다.
그 모든 것은
온통 하나인 영(靈)의 나뉨 없는 표현이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허용하는 것이
명상을 할 때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할 때도 그 바탕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것은
대다수 사람들의 삶에
혁명적인 토대가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이미 있는 그대로 허용하는 것을
우리 존재의 바탕,
우리 존재의 핵심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혁명적인 일이다.
이 말은
모든 것을 과거에 있던 그대로,
지금 있는 그대로,
미래에 있을 그대로
허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당신 삶의 바탕 자체가,
고요히 앉아 있지 않는 하루의
나머지 시간 전부가,
모든 것을 온통 있는 그대로
허용하는 것으로 채워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당신의 삶은 상당히 흥미로워질 수 있다.
왜냐하면
명상은 안전하기 때문이다.
작은 방석이나 의자,
작은 벤치에 앉아서
당신이 좋아하는 자세로 몸을 웅크려 보라.
그것은
안전하며,
마치 자궁 속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그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어떤 것도,
어떤 사람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완전히 의지할 수 있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안전한 장소를
발견하면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마음을 열고서,
명상을
단지 안전한 장소에 있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에 다가가는 방법으로
생각하기 시작할 때,
명상은 무척 흥미로워진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에 대한
저항을 그만두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는 것에 대한
저항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
우리는
아주 강력한 무언가를 발견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가장 본질적인 것,
우리 존재의 진실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의 본성인 의식이
언제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허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이와 같이 명상하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왜냐하면
의식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으며,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식 자체는 저항하지 않는다.
의식은 지금 있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가?
당신의 참된 본성인 의식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허용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좋은 하루를 누리고 있다면,
당신의 참된 본성은
당신이 좋은 하루를 누리도록 허용한다.
그리고
만약 당신의 불쾌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면,
당신의 참된 본성은
당신이 불쾌한 하루를 보내는 것 역시 방해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의식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허용한다.
우리의 의식이 하는 일은
그것만이 아니지만,
그것이 바탕이다.
정말로 자유로워지는 열쇠들 가운데 하나는 명상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는 것임을 나는 알게 되었다.
우리가 정말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허용할 때,
그런 내적 분위기,
아무것도 붙잡지 않는
그런 내적 태도를 취할 때,
그것은 매우 비옥한 공간,
매우 풍부한 잠재력을 지닌
의식 상태이다.
그러한 내맡김의 순간에
창조적인 어떤 것이 당신에게 올 수 있다.
그것은
통찰이 일어나는 공간,
계시가 일어나는 공간이다.
우리는 어떤 목표로서, 최종 목적지로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우리는 핵심을 놓치게 된다. 핵심은 단순히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허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기초일 뿐이며,
기본적인 태도일 뿐이다.
하지만
그런 기본적인 태도를 통해서도
수많은 일이 가능해진다.
그것은
지혜가 떠오르는 공간이며,
“아하!” 하는
통찰이 떠오르는 공간이다.
그것은
알 필요가 있는 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공간이다.
그 공간 안에서는
단지 마음속 작은 한 점의 의식이 아니라
의식 전체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알려 줄 수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것은
깨달음이 일어나는 공간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바로 의식 자체임을,
우리 자신이 바로 존재의
드러나지 않는 바탕임을
깨닫는 공간이다.
"아디야샨티의 참된 명상" 중에서
'선문禪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가 알아차림 자체 (0) | 2025.04.26 |
---|---|
당신이 전체라는 통찰 (0) | 2025.04.19 |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0) | 2025.04.06 |
알 수 없는 것 (1) | 2025.03.24 |
화를 즐겨라 (0) | 2025.03.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