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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당신이 전체라는 통찰

 

 

깨어남을 체험할 때 

우리는 개인적인 자유를 발견합니다. 

 

 

개인적인 자유는 

이제까지 일어난 모든 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것은 

정체성으로부터의 자유인데, 

 

정체성은 

우리를 몸과 마음, 기억, 

그리고 우리가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모든 생각으로 한정합니다. 

 

개인적인 자유 속에 있을 때 우리는 

 

“나는 자유롭다.”

 

고 느낍니다. 

“나는”은 개인적인 것이라는 냄새를 풍깁니다. 

 

이 지점에서는 자유가 

“나는”과 연관이 있지만, 

나중에는 “나는”을 넘어설 것입니다.

 

당신이 

개인적인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에 

더 이상 매혹되지 않게 되면, 

개인적이라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일어납니다. 

 

인간의 가슴속에서 시작되는 

이 사랑은 

이전에 경험했던 그 어떤 것보다 

훨씬 큰 무언가를 추구합니다. 

 

그것은 

전체의 해탈을 추구하는 사랑입니다. 

그 빛 속에서, 

개인적인 해탈은 

사소한 것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개인적인 해탈로부터 

결코 개인적이라 할 수 없는 것을 향한 

 

 

훨씬 큰 사랑과 

관심으로 확장되는 것, 

 

 

이것은 영적 구도자들이 

가장 대처하기 힘든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사랑은 

너무나 커서, 자기만의 해탈에 

이기적인 관심을 가지고 매혹되어 있는 

우리에게는 종종 위협적인 것으로 느껴집니다. 

 

‘위협적’이라는 말은 

너무나 큰 어떤 것 앞에서 

그러한 이기적 관심이 작아 보인다는 뜻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사랑은 

깨달음의 깊은 심연(深淵)에서 

직접 나옵니다. 

 

그 사랑은 

 

올바른 일을 한다든가 

착한 사람이 된다든가 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생각은 

영적인 옷을 입고 변장한 

에고적인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저는 마음 너머에서, 

의식 그 자체에서 나오는 

사랑의 힘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질문 

영성(靈性)에 매료된 사람과,

살아가는 모습으로

영성을 실제 보여 주는 사람의 차이는

이 거대한 사랑으로의 깨어남인가요?

 

대답 

매료되어 행동하는 사람은

여전히 어떤 종류의 영적 이미지나

지적인 호기심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인보다 훨씬 큰 사랑은 

본래 완전히 다른 곳에서 나옵니다. 

 

그 사랑은 

 

진리가 전체의 진화를 위하여 

인간의 개성을 통해 표현되고자 한다는 것을

통찰하는 자리에서 나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사랑은 

 

 

당신이 전체라는 

통찰에서 나옵니다.

 

 

질문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전부를 바치는 걸

주저하는 지점이 이곳인가요?

 

대답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사랑의 깨어남인데,

사랑이 깨어나면 자기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중요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기적인 관심이

알아차림의 중심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깨달음은 

 

‘나’를 초월하는 경험일 뿐만 아니라, 

분리된 개인으로서의 ‘나’가 

더 이상 어떤 중요성도 갖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항상 이 절대적인 곳에서 시작하지는 않지만,

비개인적인 사랑이 당신을 밀어붙이는 방향은 

 

이 깨달음입니다. 

 

이 지점, 이 시기에 흔히 일어나는 일은, 

자기에게 집착하는 ‘나’의 남아 있는 것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자기가 그 큰 사랑 속으로 사라지게 놓아두면

안 되는 101가지 이유를 찾아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질문 

제가 관심 있는 것이 바로 그 밀어붙임,

그 전개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 대한 경험을 좀 더 듣고 싶군요.

 

대답 

궁극적으로 우리는

그 완전히 비개인적인 사랑의 움직임에

‘예’라고 말하거나 ‘아니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예’라고 말하는 지점에 도달하는 길은

멀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그 지점에 도달해야 합니다. 

 

 

 

신은 

오로지 조건 없는 ‘예’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질문 

거기에 이르기까지

시작과 중단을 반복하게 되지 않나요?

그리고 계속해서 ‘예’라고 말하기를

선택해야 하나요?

 

대답 

순간순간의 선택이 

더 이상 없는 지점에 

도달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물론 

그것은 계속적인 순간순간의 선택일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선택하는 일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매 순간 어디로 가야 할지 

확신하지 못하는 결정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예’라고 말하는 

시기가 올 수 있고, 와야만 합니다. 

 

당신은 선택이 사라지기 때문에 

선택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을 

속으로 압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대다수 사람들이 몹시 다루기 어려워하는

양자택일에 이르게 합니다. 

 

‘나’의 남아 있는 것들은 

항상 회색지대를 찾으려 합니다. 

 

우리가 회색지대를 찾고 있는 한, 

그것은 우리가 오직 사랑만을 찾는 

그 사랑을 내면에서 

제대로 성찰해 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개인적인 자기를 초월할 때 나타나는 

굉장한 보살핌입니다. 

 

이렇게 초월할 때 

놀라운 무언가가 나타납니다. 

깊은 사랑과 보살핌이 

텅 빔 안에서, 

어딘지 모를 곳에서 나타납니다. 

 

이 사랑과 보살핌은 

매 순간, 모든 상황에서 

오직 진리만을 찾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개인적이라 불릴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훨씬 거대한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비개인적인 기적입니다. 

 

그것은 

실재 자체의 본성입니다. 

그것은 

나뉘지 않은 참나의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표현입니다.

 

질문 

어떤 사람들은 당신의 말을,

‘나’가 자기에게 초점을 맞추는 대신에

전체에 초점을 맞추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얘기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그 ‘나’가 떨어져 나가는 데서, 

자신이 전체와 다른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에서 나오지 않나요?

 

대답 

그렇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사랑은

새롭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 자신보다 더 큰 사랑은 

원래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그 사랑을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랑은 

참나에서, 

참나를 깨닫는 데서 나타납니다.

 

질문 

‘나’가 남아 있을 때는 

이 사랑을 도무지 알 수가 없겠죠.

 

대답 

맞습니다. 기껏해야 직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 정도의 사랑을 직감하는 사람은

자석처럼 이 사랑에 이끌리며,

동시에 두려움을 경험할 것입니다. 

 

이 사랑은 

 

모든 분리감, 

모든 ‘나’임(me-ness), 

모든 이기적 관심의 소멸을 추구합니다.

 

질문 

더 미묘한 귀를 발달시키면

이 직감을 얻는 데 도움이 될까요?

 

대답 

어떻게 해서든 내면에서

하나임을 직감할 수 있도록

귀를 기울이고 느껴 보십시오. 

 

하나임의 느낌이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임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당신의 참된 본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당신이 

개인적인 ‘나’의 관점에 갇혀 있을 때는 

사랑이 

당신이 아닌 것 또는 

당신보다 큰 것으로 보입니다. 

 

 

이 비개인적인 사랑은 

사실은 바로 당신입니다. 

 

 

왜냐하면 

진정 있는 그대로의 당신은 

결코 개인적인 것이었던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단지 깨달음이 얼마나 깊어졌는가,

깨달음이 얼마나 철저한가 하는 문제일 뿐입니다.

 

질문 

사랑, 

사랑하는 자, 

사랑받는 자는 

모두 하나가 됩니다.

 

대답 

예. ‘우리가 전체’라는 것을 깊이 깨달은 뒤에야

우리는 참으로 전체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랑의 광대함은 

언제나 ‘나’에게 하나의 위협으로 경험될 것입니다.

 

사랑은 

‘나’를 보살피지 않습니다. 

사랑은 

오직 참되고, 

나뉘지 않고, 

전체인 것을 보살핍니다. 

 

‘나’가 녹아 없어질 때, 

너무나 커서 마음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임’에 

‘나’가 스스로 굴복할 때, 

 

그것이 사랑입니다.

 

질문 

이 사랑 안에서, 

이 개인 안에 장애물이 있다는 인식이 타당한 것이며,

더 열리기 위해 취해야 할 조치들이 있습니까?

 

대답 

유일한 실제 장애물은 

장애물을 가진 ‘나’의 존재를 믿는 것입니다. 

 

‘나’는 

늘 자기가 장애물을 가지고 있다고 인식할 것입니다. 

 

‘나’가 

자기에게 장애물이 있다고 인식하지 않는 때는

결코 오지 않습니다. 

 

장애물을 가진 ‘나’가 있다는

잘못된 인식이

바로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완전한 깨달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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