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차림이 스스로를 인지하는 것,
즉 알아차리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떤 새로운 종류의 앎이 아닙니다.
언제나 이미 함께 있었지만,
생각하고 지각하는 활동 때문에
가려졌던 것들을 단지 명확하게
볼 수 있게 되는 것뿐이지요.
또한 알아차림이
스스로의 본질적인 특성을
깨닫게 되는 것 역시
특별한 소수의 정신에게만 허락된
특권적인 경험인 것도 아닙니다.
알아차리기는
모든 사람들의 경험들 안에서
동등하게 빛납니다.
심지어는
깊은 우울마저도
알아차림의 빛으로 비추어집니다.
알아차리기는
묻혀 있거나 가려져 있지 않으며,
찾기 힘들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모든 경험을 알게 하는
앎의 빛이지요.
라마나 마하리쉬와 부처가 자신의 마음의 본성에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무슨 특별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처는 그저
나무 아래 앉아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내 마음의 본성을 깨달을 때까지
나는 여기에 머무르겠다.”
그의 마음의 근본적 본성은
우리들 각자 마음의 근본적 본성과
완전히 동일합니다.
마하리쉬가 불현듯 죽음의 공포에 압도되었을 때, 그는 바닥에 누워서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 나의 근본적 본성은 무엇인가?
나 자신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몸이 죽으면 알아차림은
어떻게 되는가? ”
다시 말해서
그는 자연스럽게 자기 탐색 과정에
들어갔던 것이지요.
모든 위대한 영적, 종교적 전통들은 수많은 수행법과 계율을 만들어 냈습니다.
현실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거부감을 지닌 사람들을 위해 따뜻한 연민의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수행법과 계율 등의 수단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단련시키고 준비시켜서 결국에는 마음의 근원 혹은 본질에 다다를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이지요.
마하리쉬는 이러한 모든 점진적인 수단들을 단번에 뛰어 넘어서
자신의 현재 경험으로부터
마음의 근본적인 본성으로
바로 이동하였습니다.
마하리쉬에 의해
직접적인 길이
오늘날 다시 부활한 것입니다.
이제 직접적인
길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 알아차림에 대한 알아차림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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