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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본래의 깨달음

 

 

힌두교의 현자 샹카라Shankara 

 

 

 브라만은   사람 자신이지, 

    사람에 의해 획득되는 

   무언가가 아니다 

 

 

라고 말한다. 

불교의 황벽黃檗 선사는 

 

 

 얻을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진실이다 

 

 

라고 말한다. 

기독교 신비가인 에크하르트Eckhart 

 

 

 그대는 심상 없이 또한 수단 없이( 없이) 

   하나님을 알게 되리라 

 

 

 말한다. 

현대의 현자인 크리슈나무르티Krishnamurti 

 

 

 진리는 가까이 있다. 

  진리를 찾으려  필요는 없다. 

  진리를 찾는 자는 

  결코 그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한다.

에크하르트가 말한 것처럼, 

 

궁극에 이르는 수단은 없다.’ 

아무런 기법도, 길도 없다. 

 

왜냐하면 

궁극에는 모든 곳과 모든 때에 존재하는 

편재遍在적 성질(omnipresent)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축축함을 찾아  파도에서  파도로 

뛰어다니는 사람의 그것과 흡사하다. 

 

우리는 

자신의 현재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있을 정도로 

고요함을 유지하지 못한다. 

 

 

언제나 다른 곳을 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는 답으로부터 달아난다.’ 

  너머만 바라보고 있으면 

현재 상황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는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추구, 우리 자신의 욕망, 

그것이 발견을 앞질러 방해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찾고 있는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언제나 바로  

 

 

 현재경험 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나 

현재경험으로부터 

달아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답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답으로부터 달아나고 있다.

 

 

하지만  말이, 

해야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현재로부터 달아나기를 

멈춰야 한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지금  순간에 

완전하게 접촉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일까? 

 

이런 의문은 

좀더 세심하게 살펴볼 때까지는 

충분히 그럴듯한 의문처럼 보인다. 

 

 

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조차 

전적으로 핵심에서 빗나간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하는가 말이다. 

 

그것은 여전히 

좀더 축축한 물을 찾아 

현재경험의 파도로부터 달아나려는 

 하나의 시도가 아닐까? 

 

무언가를 하려 하든,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든, 

거기에는 반드시 

어떤 움직임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바로  단계에서부터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것을 획득하려 하더라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이것이 

합일의식의 가장  역설逆說이다. 

 

 점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명쾌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경우, 

 

지금과 똑같은 상태로 

남아 있게 되리라는  또한 

너무나 명백한 일이다. 

 

마조馬祖선사는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퉁명스럽게 말한다. 

 

 

 도道에 있어서는 

  자신을 수행해야  아무것도 없다. 

  만일 거기에 수행할 것이 있다면, 

   수행의 완성은 

  도의 파괴를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도道에 아무런 수행이 없다면, 

   사람은 무명無明상태로 

  머물게  것이다. ”

 

 

우리는 주요 신비사상들의 본질적인 문제에 도달했다. 

, 합일의식의 실현에는 

특별한 상태(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을지라도)

마땅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특별한 상태가 

합일의식으로 이끌어주는 것은 아니다. 

 

 상태들 자체가 

바로 합일의식의  가지 표현이다. 

 

 상태들은 

본래 깨달음의  가지 형식적, 

의식儀式적인 구현이자 

 향수享受이다.

 

예컨대, 선불교에는 

본래의 깨달음은 영묘한 수행이다라는 의미의 

본증묘수本證妙修라는 멋진 말이 있다. 

 

합일의식은 

어떤 수행의 결과로 

획득되는 미래 상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그것은 합일의식이 

시간적인 시작 갖고 있다는 ,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내일 존재하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합일의식을 

순전히 시간적인 상태로 만들어 놓을 것이다. 

 

그러나 

합일의식은 영원히 현존하기 때문에 

이는 전혀 받아들일  없는 전제이다.

 

 

 

합일의식은 

언제나 현존한다는 자각이 

바로 우리의 본증’, 

 본래의 깨달음이다. 

 

 

 

본래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옛날에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지금  순간의 

근원이자 기반이기 때문에, 

 

현재 형상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 무경계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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