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마음, 마음이여!
도대체가 속을 알 수 없는 놈.
기분이 좋으면 온 세상을 제 몸 아끼듯 포용하다가도, 한번 삐치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조차 남에게 양보하지 않는다.
菩提達磨 「血脈論」 보리달마 혈맥론
‘마음’에 대한 이해는 동서양이 그 시각을 달리해왔다.
동양에서는 마음이 어떤 형이상학적 의미, 즉 마음이 완전하거나 하나의 전체로서 통일을 이루고 있는 것이자 존재의 근원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중세 이후 마음에 그런 근원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대신 ‘정신적 기능’의 하나로서 이해하게 되었다.
이런 차이로 말미암아 서양의 사유체계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마음이라는 개념에 대한 혼란은 시작되었다. 따라서 ‘마음’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가 이루어진다 해도, 여전히 마음은 이해되지 못하거나 잘못 이해되거나 아니면 한쪽 방향으로만 이해될 따름이다. 이를테면
‘마음이 내가 아니라면,
나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와 같은 질문 등이 그것을 말해준다.
이런 주장들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 의지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일어난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마음이
‘나’라는 의식과는 전혀 관계없이
자주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음’이 올바르게 이해되지 않았기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주장들이 생겨났지만, 보통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많은 이론이 생겨났는지조차도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단지 마음을
자신의 몸과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의 기능으로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 해도,
마음이 처음부터 모든 것을 결정하는
특유한 작용을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사실상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감각정보들이 제시하는 자료들과 그들 사이의 상관관계를 꿰뚫어 보고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판단을 감행한다. 뿐만 아니라 마음은 생각과 행동의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도 한다. 순간적인 마음의 움직임을 되돌아보면,
마음은
사물을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움직인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준다.
반면에 마음은 데이터만 입력하면 그 정보를 그대로 출력하는 프로그램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엄청난 정보를 순간적으로 처리하고 판단하지만, 제공되는 감각정보를 모두 다 쉽게 믿어 버리는 문제를 함께 안고 있다.
때문에 입력되는 정보들을 참과 거짓으로 분류하고 판단하는 작용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감각정보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정보를 처리하는 프로그램을 통제하는 일, 즉 분류하고 판단하는 과정을 통제하는 기능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과 하나가 됨으로써
거짓된 정보를 알아차리는 기능이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마음에 입력되는 정보들은
단지 나타났다 사라질 뿐이다.
그 흐름의 이면에는 아무것도 없다.
‘나’도 ‘내 생각’도 없다.
오로지 순간순간 다가왔다
사라지는 정보들의 현상만이 있을 뿐이다.
바로 이 현상들이야말로
변화 속에 나타나는 흐름임을 깨닫는 것,
그것이 곧 깨어 있음이다.
진정한 깨어 있음은
나를 ‘나’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 일상을 여유롭게 만드는 마음의 기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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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이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은 참과 거짓을 분별하여야 하는 것이 아니다. 참도 거짓도 하나의 마음이라는 것이며 참도 완전함이요 거짓 그대로가 불완전한 것이 아닌 완전하다는 것이다.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그 사이에 내 생각의 집착으로 감정의 요동이 있으나 그 현상이 곧 변화하며 흐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붙잡아 있는 마음이 허상임을 아는 것이 깨어남이다.
내가 있다.
내 생각이 있다는
내가 그 것을 놓아주지 않은 것이다.
나에게 온 것은 가고,
지금 없음에도 있는 것 처럼 착각한다.
지금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더 나은 최선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보는 이대로가 최선이요 정견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