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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두려움을 직면할 때,

사람들이 의미 있는 영적 변화를 겪기 직전에 

가장 많이 경험하는 것이 다양한 두려움이다. 

열반, 깨달음, 깨어남으로 통하는 (선불교에서 말하는) 

문 없는 문에 문지기가 있는 것 같다. 

 

우리를 제지하는 것도 없고 위협하는 것도 없으므로 

뚜렷한 장애가 없지만 우리는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깨달음의 전체 풍경은 

삶을 전혀 다르게 보고 경험하는 것이므로, 

일어나는 깨달음에 대한 직감은 

흥미진진한 동시에 섬뜩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음, 무슨 일이 일어날까?”라고 묻고, 

우리는 곰곰 생각하고서 우리가 모른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이때 깨달음이 두려워진다.

 

영적 삶을 산다는 것의 일부는 깊이 의식하게 된다는 것이고, 그러면 삶에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일어난다고 해서 항상 실제 위험이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우리 인간은 아는 것이 우리를 안전하게 해주는 반면, 모르는 것은 잠재적인 위협이며 두려움을 일으킨다고 여기도록 조건화되어 있다. 하지만 그 믿음을 다시 검토하고 두려움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모르는 것보다 더 두려워할 만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친구나 배우자와 말다툼을 벌일 때도, 대개 두 사람 각자가 자신이 옳고 그른 것을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툼이 일어난다. 우리가 자신과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는 대개 옳은 지식이 아닌 생각이나 믿음이나 의견에 집착할 때 생긴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우리는 이를 전혀 반대로 생각한다. 미지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건 위험하지 않지만, 언제나 미지에서 도망가는 것은 끊임없이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 



그러므로 

두려움에 대처하는 최선의 길은 

두려움을 직면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 즉 두려움으로부터 도망가면, 우리가 피하고 도망가는 것이 무엇이든 더 두려워하게 된다. 더 오랫동안 도망갈수록 그것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면이나 삶에서 마주치는 

미지의 영역에 대한 두려움의 바로 한가운데서 

멈출 수 있으면, 

두려움은 지속될 수가 없다. 




두려움이 감정이나 느낌으로라도 계속 일어나고 존재하려면 두려움에 저항하고, 그것으로부터 도망가고, 끊임없이 두려움과 협상하려 해야 한다. 반면에 두려움을 직면하면, 




즉 두려움을 ‘경험’하면 

두려움이 우리를 움직일 수 있는 수단은 

아무것도 없다.




멈추어서 

두려움과 함께 있고 

이를 느끼면 

 

모든 두려움이 

똑같지 않다는 걸 배우게 된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가 미지로부터 도망갈 때만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이를테면 

“매 순간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혹은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다.”는 말은 

사람들을 두렵게 한다. 

 

왜 그럴까? 

 

이 말들은 사실을 말한 것일 뿐, 두렵게 하는 내용은 없다. 그런데 왜 그 말들에 맞서 싸우겠는가? 그 말들에 맞서는 까닭은 




주로 우리가 멈추지 않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만나지 않고, 

생각에 빠지기 때문이다. 




생각은 두려움이 무성한 곳이다.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무엇이 목전에 닥쳤는지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은 두려움 반응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그것이 끝없이 계속되게 한다.



두려움을 만나는 경험을 하면, 

그것이 그리 겁나지 않게 되고, 

점차 두려움은 위험하지 않다는 걸 

우리의 몸과 마음이 알아차린다. 

 

진정한 의미에서 

‘나’와 나의 본성은 미지라는 걸 상상해보라. 

그것을 깨달으면 미지가 덜 두려워진다. 



우리가 자신을 삶이 아닌 다른 것으로, 

삶 자체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여기고, 

미지가 아닌 다른 것으로 여길 때, 

그 단절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두려움을 직면할 때 

우리가 받는 가장 큰 은총은, 

우리가 두려움으로부터 도망갈 때가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도망친 것이고, 

가장 깊은 의미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부터 

도망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삶의 미지의 부분과 

두려움에 직면하여 굳게 서 있으면, 

두려움은 우리와 적대하지 않고 

위협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두려움은 새로운 것, 

즉 막 인식되거나 

곧 일어날 미지의 어떤 것의 전조가 된다. 

 

거기엔 이상한 게 아무것도 없다. 

미지는 끊임없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삶과 존재에서 불가결한 부분이므로, 

‘나’와 지금 그대로의 ‘나’에게 필수적인 부분이다. 

 

우리가 멈추어서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두려움에 휘둘릴 것이다. 

 

멈추어서 두려움을 직면할 때,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면서 

완전히 고요하고 평안할 때, 

두려움이 우리를 해칠 수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두려움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움을 

적대시하거나 도망가지 않으므로 

삶과 내면의 풍경은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다.

 

두려움이 가르쳐줄 수 있는 큰 교훈

—두려움의 한가운데서 멈추는 지혜—은 

두려움이 늘 위험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이 

두려움은 새로운 것, 

혹은 미지의 것을 알려주는 신호일 수 있다. 

또한 완전히 새로운 의식 상태가 

열리는 걸 가리킬 때도 있다. 

 

그때 두려움은 잘못된 것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일이 제대로 되고 있고, 우리가 미지를 직접 경험하고 있다는 표시이다. 우리가 구도자라면,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상황이다. 깨우침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우리의 본성을 알 수 있는 것은 ‘미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로 미지이다.

 

 

    아디야샨티의 가장 중요한 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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