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선문禪門

내려놓음

 

내려놓음

 

‘어떻게 이것을 벗어나는가?

 

이 의문은 에고 의식의 관점에서 나온다. 에고 의식은 언제나 불편한 것을 제거하려 한다. 하지만 말할 것도 없이, 무엇이든 없애려 하면 오히려 더욱 살아남는 법이다. 무언가를 없애려 하는 바로 그 행위가 그것을 살아남게 한다. 

 

그 무언가를 없애려고 애씀으로써, 

무의식적으로 거기에 현실성을 보태주는 셈이다. 

 

무언가를 없애보려 애를 쓰고 있다면 우선 그것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해야만 하고,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현실성을 보탬으로써 



자신이 없애려 애쓰는 바로 그것에다 

에너지를 더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틀어쥠은 어떤 기법으로써 해결할 수가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앎이야말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깨달음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물음은 

실은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

라는 물음을 베일로 가린 것이다. 




이렇게 내 뜻대로 해보려는 마음에 대한 유일한 해독제는, 그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 마음을 어떻게 내려놓는가? 이것은 까다로운 문제다. 내 뜻대로 해보려는 마음을 내려놓으려는 그 노력 역시 내 뜻대로 해보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모두가 내려놓으려고, 내맡기려고 애써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애씀과 내맡김은 서로 배타적인 개념이다. 




애쓰고 있는 한 

내려놓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하여 결국 모든 기법이 사라지고, 의식을 뜯어맞춰 더 확실한 경지에 이르는 방법이 아무런 소용도 없게 되는 때가 오고 만다. 어떤 기법도 통하지 않는다. 이제는 실존적 차원에서, 



내려놓기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또한 내맡기기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온다. 그럼에도 내맡김과 내려놓음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이 시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실, 

즉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을 남김없이 받아들이는 것, 이러한 앎에 남김없이 관통당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마지막으로 남은 내려놓음이다. 그것이 바로 움켜쥔 주먹이 펴져 열리는 것이요, 가장 기본적인 실존 차원의 자아의 느낌이 열리는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음이 깨우쳐져야만 한다. 여러분은 끝장에 이르러야만 한다. 밧줄의 끄트머리까지 가야만 한다. 그럴 때라야만 내맡김이 스스로 일어날 수 있게 된다. 

 

인간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모든 집착이 헛된 것임을 깨닫는 것이며, 

또한 모든 집착은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외면하는 것을 

위장하는 한 형태일 뿐임을 아는 것이다.

 

  

아랫배 차원에서 움켜쥐기를 이제 그만 포기하게 되면 마치 자기가 죽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죽는 것은 ‘내’가 아니고, 

분리된 자아라는 환영이다. 




그런데도 꼭 자기가 죽을 것만 같이 느껴질 수가 있는 것이다. 오직 스스로가 기꺼이 진리를 위해 죽으려 할 때만, 움켜쥠을 정말로 깨끗이 놓아보낼 수 있다.

 

  

아랫배 차원의 깨어남은 우리가 가진 가장 깊은 실존적 두려움을 직면하여 풀어놓기를 요구한다. 또한 이 깨어남은 여기서 ‘내 뜻’이라 표현되는 것, 즉 우리 안에서 ‘이거라야만 해, 이 방법이어야만 해’라고 우기고 있는 부분을 똑바로 직면하고 풀어놓기를 요구한다. 



‘내 뜻’이란 결국 하나의 환영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통제하거나 지휘하려고 ‘내 뜻’을 휘둘러 보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환영이든 아니든 간에 우리는 그것을 직면하여 다뤄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진리 자체를 향한 전적인 내맡김의 자세, 철저한 헌신과 진실성이 요구된다.

 

진정한 앎의 실현, 

즉 진정한 깨달음은 

‘내 뜻’을 완전히 내려놓아야만 찾아온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환영 속의 자아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자아는 ‘내 뜻’을 내려놓는 것을 끔찍한 사건으로밖에는 해석할 수가 없다. 우리는 내려놓는다는 것 자체를 위험에 노출되는 것으로 여겨 두려움에 몸을 떤다. 

 

우리는 생각한다. ‘내 의지를 내려놓았다간 다시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을 거야. 세상이 내 원하는 식으로 굴러가주지 않을 거야. 이젠 어떤 일도 내가 바라는 쪽으로 풀리지 않을 거야.’

 

마지막에 가서야 우리가 알게 되는 사실이 있으니, 

이런 결론은 한갓 생각일 뿐이라는 것이다. 



‘내 뜻’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내 뜻대로 해보겠다는 식의 마음은 우리가 거쳐가야 할 경험이다. 

 

이것이 바로 환상을 벗어나는 지혜를 만나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남을 느낀다는 것은, 내 뜻대로 하려는 마음의 끝자락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내 뜻대로 하려는 마음의 끝자락 

그 절벽에 도달해야만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마약이나 알코올에 중독되었다가 회복된 사람은, ‘내 뜻’의 벼랑 끝에 다다르는 것이 회복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의지로 덤벼들어서는 중독 상태를 바꿀 수가 없다. 나의 의지는 그렇게 강하지 못하며,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것을 해낼 수가 없다. 

 

중독자가 ‘바닥을 쳤다’고 할 때 그 속뜻은 그 개인의 의지가 무너져버렸다는 것이다. 개인의 의지가 무너지면 완전히 다른 힘이 우리의 심신 체계에 쏟아져 들어온다. 그것은 바로 ‘영’의 힘이다. 이제 그 힘이 작용을 개시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더 이상 ‘내 뜻’만 부여잡고 있음으로써 그 힘을 회피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가 각자의 깨어남의 길에서 ‘내 뜻’의 한계에 맞닥뜨리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점을 달리해가며 갈수록 깊은 차원에서 그것을 맞닥뜨린다. 그것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말이다.

 

  

‘내 뜻’의 상실은, 사실은 결코 상실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치 밑바닥 인간으로 떨어진 것처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허둥대는 모습이 아니다. 

실제로는 그와 정반대이다. 

‘내 뜻’이라는 환영을 포기함으로써, 

 

전혀 다른 의식 상태가 자기 안에 태어난다. 



‘거듭남’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안의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부활이다. 

이 부활은 영성의 많은 부분이 그런 것처럼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삶 그 자체의 완전함과 전체성에 의하여 

‘움직여지기’ 시작한다.



       깨어남에서 깨달음까지 중에서




 






'선문禪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혹과 깨달음  (0) 2020.12.02
우리 자신을 잊는 그 순간  (0) 2020.11.28
헛됨도 없다  (0) 2020.11.21
감정으로부터의 자유  (0) 2020.11.17
이원적인 세계  (0) 2020.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