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있기에 세상을 볼 수 있지만,
반대로 눈이 사물에 대한 관찰을 제한하기도 한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진실하다고 믿는다. 지금 내 앞에는 책상, 손목시계, 스탠드가 있다. 물론 그것들은 내 눈 앞에서 존재하고 손으로 만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똑같은 책상, 손목시계, 스탠드라도 다른 사람이 본다면 나와는 또 다르게 묘사할 것이다.
사람마다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똑같은 사물이라도 자신의 관점에서 벗어나
타인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도 있다.
동시에 여러 가지 방향에서 동일한 사물을 바라볼 수는 없을까? 그건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그런 상상을 떠올리며 사물에 대해 생각한다면 사물의 본래 모습에 점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적어도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사물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방향에서 보면 둥글지만 반대 방향에서 보면 네모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상 자체는 둥글지도 네모지지도 않다.
그저 그곳에 있을 뿐이다.
관찰 대상의 모습은 전적으로 우리의 느낌에 의해 결정된다.
사람의 느낌이 투사됨으로써
비로소 대상의 형태, 온도, 질감 등이 정해지는 것이다.
인간 세상의 소음은 대부분 우리 자신이 주관적인 편견을 벗어나지 못함으로 인해 생겨난다. 주관적인 편견을 세상의 진실로 착각한 채 타인을 인정하지 못하고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이런 주관적인 편견이 시시때때로 삶을 옭아매고 소중한 자원을 낭비시킨다. 이를 피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화가 치밀거나 짜증이 날 때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화가 누그러지고 마음이 평온해질 수 있다.
더 나아가 사람이 아닌 다른 생물의 관점도 이해할 수 있다. 세상에 인간이 없고 고양이, 개, 코끼리, 호랑이 같은 것들만 있다면, 그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 보자.
만약 동물도 식물도 존재하지 않아서
그 어떤 ‘관점’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세상을 느낄 생물이 하나도 없다면,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걸까?
만약 존재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관세음보살은
모든 ‘관점’은 사물 본연의 모습을 숨기고 있으며
모든 사물은 공임을 깨달았다.
그는 우리를 잠시나마 어지러운 세상에서 꺼내
끝없는 우주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우주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이것은 눈으로 보는 것도 아니고,
특정한 방향에서 보는 것도 아니다.
바로 마음으로 보고 모든 방향에서 다 바라보는 것이다.
그때 보이는 것이 비로소
존재의 온전한 모습이다.
모든 개체는 언젠가는 반드시 사라진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이 동물은 기나긴 세월 동안 유지되어 왔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유지될 것이다. 미지의 미래에 인간이 멸종한다고 해도 지구는 계속해서 유지될 것이다. 지구가 어느 날 갑자기 폭발해서 사라진다 해도 은하계는 계속 유지될 것이고,
은하계가 사라진다고 해도
우주라는 이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는 것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개체의 사망은 두려울 것이 없다. 우주의 품 안에서 인간은 평온하게 잠들 것이다. 영원히 우주를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도시의 숨 막히는 공간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머리 위의 하늘을 잊지 말라고, 새벽과 밤에 그것들을 올려다보라고 말해 주고 있다.
인간사 소란은 대부분 자신이 주관적인 편견을
벗어나지 못함으로 인해 생겨난다.
속 좁은 자아 세계에서 벗어나,
도시의 숨 막히는 공간 너머로 새벽하늘을 보라.
평생 걱정 없이 사는 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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