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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나’의 실체가 없습니다.

 

 

가을하늘의 아침 공기가 참 신선합니다. 

 

그 신선함에 취해 끌리듯 마당으로 나와 다시 한번 감탄사를 토합니다. 마당 한쪽 끝에 한 무더기 피어 있는 국화 때문입니다. 탐스럽게 피어 있는 국화는 언제 보아도 그윽하고 청초합니다. 더구나 아침이슬을 머금고 노랗게 핀 국화는 맑은 가을하늘과 함께 신선함을 더해줍니다. 그런 국화를 한동안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고등학교 때 배운 서정주님의 ‘국화 옆에서’를 중얼거려 봅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어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어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내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언제나 외워도 그때마다 새로운 맛을 더해 주는 시입니다. 이 시를 외고 있노라면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그때 우리 국어 선생님께서 이 시를 설명하면서 연기(緣起)와 윤회를 설명했던 것이 어렴풋이 생각납니다. 그때는 연기나 윤회의 의미도 잘 모른 채, 그저 시험에 나온다고 하니 무조건 줄치고 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를 알면서부터 가끔 이 시를 가르쳤던 우리 국어 선생님께서는 그 연기라는 것을 알고 가르치셨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연기(緣起)라는 단어가 단 한 시간 시를 배우면서 알 수 있을 만큼 쉬운 의미가 아닌데 우리에게 어떻게 설명 했을까, 하는 궁금증도 생깁니다. 

 

왜냐하면 연기라는 사전적 의미는 알고 있어도, 연기의 깊은 세계를 안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왠 만한 불교 신자라고 해도 연기의 흐름을 보고, 연기의 깊은 뜻을 아는 사람은 참 드뭅니다.

 

제가 불교를 알고, 연기의 깊은 의미를 알면서부터 이 ‘국화 옆에서’ 시는 저의 애송시가 되었습니다. 그 의미를 생각하면 할수록 시가 품고 있는 사상이 참 기가 막히게 아름답고 철학적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울고,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그렇게 울었다는…….

 

하지만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와 천둥만 울었겠습니까? 햇빛이 울고, 공기가 울고, 흙이 울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아마 이 우주 법계가 울었을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우주의 모든 법이 

그 국화꽃 한 송이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국화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볼 때 저 아무렇게나 피워있는 저 작은 들꽃에도, 우리가 먹는 밥 한 톨에도, 우리의 몸에도…, 그 우주의 법계가 들어 있습니다. 법성게에서 나오는 

 

일미진중 함시방(一微塵中 含十方)입니다. 

한 티끌 속에 온 우주가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참으로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 우주의 생명들입니다. 자연계는 모두 서로 얽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주 생명체 어느 한 가지라도 혼자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연 따라 얽혀져 

대해처럼 흘러가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국화는 국화가 아닙니다. 

우주입니다. 

당신도 그렇고, 나도 그렇습니다. 

우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이는 ‘나’를 고집합니다. ‘나’와 ‘너’를 분별합니다. 그래서 고통스럽습니다. 본질은 너와 나가 하나인데 중생들은 너와 나를 분별하여 비교하고 경쟁하고 어떻게 하든 ‘너’를 딛고 일어서려 합니다. 그래서 평화를 모르며 즐거움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너’없이 ‘나’는 존재 할 수 없으며, 

‘나’없이 ‘너’는 존재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존재하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합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깨달으신 연기법입니다. 모든 본질은 연기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연기법은 결국 모든 물체가 자기 자신만의 실체가 없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무아(無我)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문제에 있어서 늘 ‘나’ 존재를 우선합니다. ‘나’가 없는 세상은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나’를 찾아보면 ‘나’의 실체는 없습니다. 

 

이름이 ‘나’일까요? 직업이 ‘나’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이름이나 직업은 바뀔 수가 있는 껍데기에 불과한 표현입니다. 그러면 내 몸이 ‘나’일까요? 그것 역시 아닙니다. 정신없는 몸뚱아리만 가지고 나라고 하기에는 그것은 죽은 시체와 같기에 ‘나’라고 말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정신이 ‘나’일까요? 

몸둥아리 없는 정신은……? 귀신이나 마찬 가지입니다. 

그러면 몸과 정신을 가진 것을 

온전히 ‘나’라고 말 할 수 있을까요? 

몸과 정신을 가진 것이 ‘나’라면 

이름이나 직업처럼 바뀌는 껍데기가 아니라, 

바뀌지 않은 실체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몸과 정신이 있는 ‘나’도 매순간 바뀌고 있습니다. 어제의 내 몸의 세포와 오늘의 내 몸의 세포가 다릅니다. 어릴 때의 나와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나는 생각도 다르고, 몸도 다릅니다. 그것은 마치 밤에 멀리서 거리의 자동차의 불빛을 보면 한줄로 그어진 불빛 같지만, 가까이 가보면 각기의 자동차가 비취는 불빛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나’는 누구입니까? 

도대체 나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나를 알아야 지금 ‘나’라고 착각하고 있는 

이 놈을 뿌리 뽑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나’는 찾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사실은 바로 ‘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아(無我)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실체가 없습니다. 



‘나’라고 착각하고 사는 것은 순간순간 끊어진 몸과 마음이 멀리서보면 자동차 불빛처럼 이어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순간순간 끊어진 몸과 마음을 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부릅니다. 



오온을 들어다보면 다 그렇습니다. 좀 더 확대해보면 우주가 다 공(空)입니다. 연기이기 때문에 공(空)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공은 아예 ‘없다’ 라는 말과는 조금 틀리는 말입니다.

 

오늘 아침 핀 국화는 우리 눈에는 국화라는 꽃으로 보이지만 그 실체를 찾아보면 여러 요소가 연기에 의해 한데 뭉친 하나의 결정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국화만이 아니라 인간을 비롯한 우주 만물이 그렇습니다. 제법이 무아인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아침 국화가 던져 준 진리입니다.

 

 

    흔들림 속에 고요함이 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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