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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무소주 無所住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경 문 

 

이런 까닭으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응당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응당히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히 성ㆍ향ㆍ미ㆍ촉ㆍ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요,

 

     



해 설 



  마치 바다가 만 강에서 흘러오는

 

  만 가지 맛의 물을 다 받아들임과 같이,

 

  마치 용광로가 온갖 종류의 잡철을

 

  다 받아들여 붉게 끓어오르는 것과 같이

 

  일체 경계를 하나도 남김없이

 

  다 자성에 내려놓은 것을

 

  청정한 마음이라 한다.

 

   

 

자기가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는 일체 상대적인 경계에 집착하여 마음을 내지 말라는 말이다. 내 몸이라든가 내 생각이라든가 내 마음이라든가 내 느낌이라든가 이런 것이 모두 



시공간에 조건 지워진 

‘나’라는 에고에 머무는 것이요, 

갇히는 것이다.



‘청정한 마음’이란 

더러움에 상대되는 깨끗한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바닷물과 같아 

바다는 만 가지 강에서 흘러오는 만 가지 맛의 물을 

다 받아들이되 한 방울의 물도 분별하여 거절함이 없이 

받아들이지만 모두 한 맛으로 만들어 버림과 같다. 

 

또한 마치 용광로와 같아 

온갖 종류의 잡철이 용광로에 들어가면 

모든 이름은 없어지고, 

하나의 붉게 끓어오르는 한 맛으로 남는 것과 같다. 

 

이 한 맛의 이름을 청정이라 한다.

 

바다와 용광로는 어디에 있는가. 

자기의 마음근본, 자성이 그것이다. 

 

일체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으로 들어오는 경계를 자성에 모두 내려놓을 때 이를 청정이라 한다. 그래서 경經에 ‘모든 보살마하살은 응당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라고 하였으니, 본래 청정한 자성에 의지하여 일체의 분별망상을 자성인 용광로에 놓고 놓아가면 청정심을 성취하게 되기 때문이다.

 

육조 스님은 



“모든 수행인은 남의 잘잘못을 말하지 말지니 

 스스로 말하되, 나는 잘 하고 나는 잘 안다 하여 

 마음으로 배우지 못한 사람을 가벼이 여기면 

 이것은 청정심이 아닌 것이다. 

 자성에서 항상 지혜를 내서 평등한 자비를 행하고 

 하심下心하여 일체 중생을 공경하는 이것이 

 수행인의 청정심인 것이다.”

 

 

   

 

야부 |

 

비록 그러하나 눈앞에 있는 것을 어찌 하리오.

 

   

 

해설 |

 

비록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에 머물지 않는다 하지만 

색성色聲을 보는 놈은 누구인가. 

마치 일체를 비추어 나투게 하는 광명은 또한 

일체 존재의 형상을 떠나서 따로 존재하지 못하듯이 

이것도 둘이 아닌 불이법이다.

 

  

 

야부 |

 

색을 봄에 색에 간섭받지 않고 

소리를 들어도 이 소리가 아니로다.

 

색과 소리에 걸리지 않는 곳에서 

친히 법왕성法王城에 이르도다.

 

   

 

해설 |

 

저 사람을 보면서 잘났다 못났다, 마음에 든다 안 든다 하는 것이 색에 간섭받는 것이요, 칭찬하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고 비판하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나쁜 것이 소리에 간섭받는 것이다.

 

일체의 경계를 자기의 자성에 내려놓고 지켜보면 

이것을 이름 하여 색과 소리에서 벗어났다 하고 

색과 소리에서 벗어나 걸림이 없으면 

본래 부처를 체험했다고 한다.

 

     

 

경문 |

 

응당히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應無所住 而生其心

 

   

 

해설 |

 

닦음이 없이 닦고 얻을 바 없이 얻어야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해야 

비로소 성품을 보고 체험하게 된다.

 

   

청정한 마음을 이루는 법문이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다. ‘응당히 머문 바 없이’란 색에 머무르지 않고, 성ㆍ향ㆍ미ㆍ촉ㆍ법에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내야 한다는 뜻이다.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의 에고에서 나오는 업식에 끄달려 탐ㆍ진ㆍ치를 부리는 중생심에 끌려 다니지 않는다는 뜻이다.

 

함허 스님의 설의에 



“머문 바가 없다는 것은 

 마침내 내외內外가 없고 중간도 비어서 사물이 없는 것이 

 마치 거울이 텅 비고 평평한 저울대와 같아서 

 선악시비를 가슴 속에 두지 않는 것이요, 

 마음을 낸다는 것은 머무는 바 없는 마음으로 

 만사에 응하되 만물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머무는 바 없는 곳이란 

본각의 자성자리이고, 

자성에 의지하여 둘 아니게[不二] 닦음이 없이 닦고 

얻을 바 없이 얻어야 곧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다. 

응무소주 이생기심해야 

비로소 성품을 보고 체험하게 된다.

 

   

 

야부 |

 

뒤로 물러서고 물러설지어다. 

보고 보아라. 

굳은 돌이 움직이도다.

 

   

 

해설 |

 

일체가 벌써 작용했다 하면 

작용하기 이전 자리, 

본래 자리로 돌아가라는 말이다. 

 

물러서고 물러서라, 

놓고 놓아라, 

죽고 죽어라! 

 

그리고 지켜보고 지켜보아라! 

머문 바 없음에 머물고 법답게 마음을 내면 

태산과 같은 업보도 무너진다.

 

  

 

  야부 |

 

  고요한 밤 산당에 말없이 앉았으니

 

  적적하고 요요하여 본래 그대로라.

 

  무슨 일로 서풍西風은 임야를 움직여

 

  한 소리로 찬 기러기가 먼 하늘을 울리게 하는가.

 

   

 

  해설 |

 

경계의 바다 위에서 

일체 중생이 한마음으로 고요하니, 

본래 그대로의 적적하고 요요함을 체험한다. 

 

그런데 

 

“무슨 일로 서풍(부처님)이 임야를 움직여 한소리로 찬 기러기가 먼 하늘을 울리게 하는가.”라고 하였다. 즉 무슨 일로 다시 닦을 것을 설하고, 다시 얻을 것을 설하는가라는 것이다.

 

닦음이 없이 닦음을 설하고 

얻을 바 없이 얻음을 설하는 것을 

곧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住 而生其心

   (응당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낸다)으로 간략히 말하였다.

 

   

 

    그대 삶이 경전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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