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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있고 없음을 무시할 줄 아는



그 허망한 몸을 가지고 있는, 

생각된 자기와 생각 없는 자기를 다시 자기화함으로써 

허망한 몸을 벗어나기 위하여 

허망한 비非자기를 다시 자신으로 만든다. 

가장 확실한 비자기非自己는 자기自己라는 이름이므로

이름일 뿐이라는 비자기화非自己化를 통하여 

자기自己를 정립시키고, 

이 자기도 역시 단순한 이름이라고 자각함으로써 

텅 빈 자기를 살찌운 것이다.

 

생각 그 자체는 

그 결과가 아니라 애초에 가지고 있던 개념이다.

이 최초 개념의 붕괴를 통하여 텅 빈 자아自我가 형성된다.

여기에서 형성된다고 말하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존재 그 이상이기 때문에 

생명 있는 형성形成이라 부른 것이다.

그리고 이 부름도 역시 이름이기 때문에 

그 텅 빈 이름 자체를 일컬어 다시 여래자如來者, 

다만 이와 같이 여실하게 생성되어 다가온 것이라 한다.

여래 그 자체는 비자기로서의 생성하는 자각自覺이다.

 

이 자각이 생생하지만 

텅 빈 자체 성품과 활동을 잃지 않으므로

한 줄기 신령스레 밝고 고요한 물건[一點靈明]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기 때문이다.

 

 

시작한 말 때문에 자신이 죽는다.

죽은 말 때문에 자신을 살려낸다.

 

 

중생 덕에 부처이니, 없는 부처가 중생 덕에 있다.

그러나 중생은 영원히 부처를 모른다.

왜냐하면 부처가 부처를 아는 것은 

그가 부처 아닐 때이므로.

그리하여 중생은 그가 중생이 아닐 때 부처임을 본다.

 

만일 중생이 중생인 것이 아니라면 부처일 수도 없다.

왜냐하면 중생이 아닐진댄 

더욱이 부처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중생이 부처라면 부처는 중생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부처라고 부르자마자 곧 부처이어야 하는데

중생의 속성이 모두 이미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에게는 아무 속성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생이라는 단어는 아무런 실질적 현재성이 없다.

왜냐하면 부처를 이미 예상하여 

좁히고 다듬어 꾸며 만든 단어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여 부처는 

이미 인간이라는 생명체 전반을 가정하고

그 이상以上을 이상理想으로 삼으면서 

다시 조작한 단어이므로 실상實上 현실적이지만 

이미 현실現實 이상以上이므로 역시 現在性이 없다.

 

즉 ‘존재하지 않는 존재’라는 

異常(이상)한 소리를 해야 하는데

이 異常함이 도리어 異常하지 않은 것은 

우리가 바로 인간 아닌 인간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 자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용어는 用語인데 term(말하다)이기 이전에 

이미 씀도 모르며 우리가 ‘쓰고 있는 말’이므로

다시 용어라 불리는 것이다.

 

시불이是不是[이다-아니다]는 

먼저 알아차리는 자의 몫이다.

말을 내뱉은 것은 이미 주장인데 이 주장된 것은

用語로서만 살아 움직이기 때문에

먼저 말을 쓰는 사람에 의하여 지배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은

그 ‘존귀한’ 말을 빼앗을 줄 아는 이의 자각이다.

이 자각은 스스로의 텅 빈 실체,實體를 항상 되돌리고

반성 되어진 것을 돌이켜 省察(성찰)하는 覺惺(각성)이다.

 

깨달음은 존재하는 것들의 노획이라

있고 없음을 무시할 줄 알고

이름 있고 이름 없음을 넘나들 줄 아나니

지금도 각覺을 覺이라 비각非覺이라 하지 않는다.



   존재를 삼켜 허공을 뱉아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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