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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그 이름만 있을 뿐입니다.



“수보리야!

어 떻게 생각하느냐? 삼천대천세계의 가는 먼지를 많다 하겠느냐?”

“심히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이 가는 먼지는 가는 먼지가 아니며 그 이름이 가는 먼지이며, 여래가 설한 세계도 세계가 아니라 이 이름이 세계이니라.”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32상으로 세계를 보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어!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 하신 32상이 32상이 아니옵고 그 이름이 32상입니다.”

 

 

금강경의 핵심을 단 두 마디로 말한다면 

무상과 무주입니다. 

 

그 중에서 무상(無相)이 금강경의 핵심인데 특히 

나(我)라는 상을 가진 아상, 

너 라는 상을 가진 인상(人相) 

그리고 중생상과 목숨을 가진 수자상등의 

4가지 상(相)을 가지지 않은 것이 

보살의 모습이라고 금강경은 역설하고 있습니다. 

 

상(相)을 가진 것은 

그 이름만 있을 뿐 상(相)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상(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름만 가진 껍데기 일 뿐이며 

본질에서 인연에 따라 만들어진 

그림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相)이란 그 실상을 보자면 본질과 하나로 연결 되어 있습니다. 마치 토마토나 토마토를 갈아서 그 주스의 성분이 같은 것처럼 원래 하나인데 그 상만 변했을 뿐입니다. 그 이름만 토마토입니다.

 

우리 인간도 물질적인 측면만 생각해보면 모두다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는 본질이 변해서 서로 다른 모습들을 만들어 놓았을 뿐인데 우리는 잘 생겼고, 못 생겼고, 예쁘고 밉고, 키가 크고 키가 작고 흑인이고 백인이고 등등 많은 차별을 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평생 마음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 모든 것은 이름만 있을 뿐입니다.

 

나(我)라는 상(相)만 보아도 그렀습니다. 상(相)이란 다른 말로 ‘이미지’라고 말 할 수 있는데, 나라는 이미지 때문에 또는 나의 체면 때문에 세상일이 괴롭고 힘듭니다. ‘내가 누구인데…… 이런 것을 하고 있어?’ ‘내 체면에 이런 짓을 할 수 없잖아.’라고 자신을 높게 평가하거나 또는 ‘나는 할 수 없어’ ‘내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어?‘라고 자신을 비하하기도 합니다. 

 

스스로 만들어 놓은 

나라는 상(相)으로 세상을 재단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나의 본질을 찾아보면 

‘나’는 도대체 없습니다. 

그 이름만 있을 뿐입니다. 

 

직업도 ‘나’가 아니고, 이름도 ‘나’가 아니고 누구의 남편,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들…… 그 모든 것들이 이름만 있을 뿐, 때가 되면 사라질 것들입니다. 몸도 그렇고 생각도 그렇습니다. 모두 이름만 있을 뿐 실체가 없습 니다.

 

권력의 높고 낮음, 재산의 있음과 없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이름만 있을 뿐 실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높고 낮음, 있음과 없음은 언젠가 인연이 되면 사라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부자도, 권력을 가진 사람도, 죽음 앞에 한갓 재에 불과 합니다. 



높고 낮음, 있음과 없음의 본질은 

공(空)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이름만 있는 것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원리 전도몽상해서 오늘 하루도 괴롭습니다. 인상(人相)도 마찬가지이고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子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름만 있을 뿐,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운문이 말했다.

 

“세계가 이렇게 넓은데 무슨 까닭으로 종소리에 칠조가사를 입느냐?”

 

간단한 선문답인데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본질은 하나인데 세상 사람들은 차별하고, 분별하면서 남과 대결하고 자신을 괴롭히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름만 있을 뿐,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며 오늘도 더 많이 가지려고 더 높이 오르려고 발버둥 치며 살아가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모든 것이 한 집안일인데 오늘도 안팎으로 전쟁을 일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순간 이 본질을 보려는 자세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 모든 것은 이름만 있을 뿐, 본질은 하나라는 자각이 필요합니다. 

 

모든 만물의 본질은 무아(無我)입니다. 

모든 만물이 ‘나’라는 상(相)이 없는 이름만 있는 것입니다.

 

 

    흔들림 속에 고요함이 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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