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선문禪門

시공을 초월하다

시공을 초월하다


  

  이치를 깨달으면 본래 다르지 않거늘

 

  깨달은 뒤에 누가 늦고 누가 이르리오.

 

  법계는 그 양이 허공과 같거늘

 

  중생의 지혜가 스스로 작다.

 

  다만 ‘나’라는 것을 일으키지 않으면

 

  열반의 법식으로 항상 배가 부르리라.

 

  

 

강 설 

 

시간상으로 먼저와 뒤, 

공간적으로 크고 작음을 설명한 내용이다. 

 

대개의 사람은 깨달음의 문제에서부터 젊고 늙고 한 점에 이르기까지 선과 후가 있고 빠르고 늦은 것이 있는 줄로 안다. 큰 집, 작은 집이 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안다. 

 

실은 그 모두가 한낱 꿈속의 일이다. 

 

꿈을 깨면 

모두가 같은 순간의 일이며 같은 공간의 일이다. 

먼저와 뒤도 없고 크고 작음도 없다. 

시간도 공간도 툭 터져서 경계라는 것이 도무지 없다.

 

그러므로 ‘나다, 남이다’라는 분별이나 

‘선이다, 악이다’라는 분별을 일으키지 않으면 

모든 문제와 모든 고통이 사라진 

열반이라는 진리의 음식으로 항상 배가 부를 것이다. 

 

배만 부른 것이 아니라 

온 천지가 모두 나의 집이며 

내가 돌아가 쉴 곳이리라. 

 

이와 같은 안목이 있으면 비록 누더기를 입고 밥을 빌어먹으며 다리 밑에서 잠을 청하는 삶일지라도 그는 진정으로 위대한 인생이리라.




  꿈꿀 때 꿈속에서 하는 일과

 

  깨었을 때 깨어 있는 경계가 모두 없다.

 

  깨었을 때와 꿈꿀 때를 바꿔서 생각하니

 

  전도된 두 가지 견해가 다르지 않네.



강 설 

 

월창거사의 술몽쇄언(述夢瑣言)이라는 글이 생각나는 내용이다. 우리는 흔히 꿈을 꿀 때 꿈속의 모든 내용은 허망한 것이고, 깨었을 때 보고 듣고 하는 일은 모두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꿈속에서의 정승보다 깨었을 때의 거지가 낫다고 말한다.

 

그렇게 생각하므로 현실의 삶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고통을 불러와서 어려움을 스스로 겪는다. 

 

꿈도 꿈으로서 허망한 것이고 

꿈을 깨었을 때도 역시 허망한 것이라고 알고 나면 

나날이 가볍고 편안한 삶이 될 것이다.




'선문禪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있는 그대로  (0) 2020.08.10
있음과 없음  (0) 2020.08.09
만물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0) 2020.08.07
마음이면서 몸이다.  (0) 2020.08.06
처음부터 가진 것은 없었다  (0) 2020.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