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선문禪門

진정한 방하착 放下着

진정한 방하착 放下着

 

 

 

가끔 뱃전에 서서 포말을 일으키며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물보라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꼭 그것이 우리네 삶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시간이라는 것도 그 포말과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뱃전의 포말은 한바탕 포말이 일어났다가 잠시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도 현재에 잠시 삶에 들끓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현재의 우리의 삶은 사라지고 맙니다. 현재는 과거가 되고, 과거는 그냥 오직 우리의 머릿속에만 존재할 뿐 우리의 삶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포말처럼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미 지나가버린 존재하지 않는 과거 때문에 괴로워하고 아파하기도 합니다. 기억의 잔상 때문입니다.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잔상이 현실의 삶에 나타나 현재를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현재를 괴롭히는 것은 

과거에 대한 잔상과 그 집착입니다. 



그런데 기억의 잔상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그것을 물 흐름처럼 떠나보내는 힘이 있다면 우리를 아프게 했던 그 기억은 더 이상 우리를 그처럼 괴롭히지 못할 것입니다. 



그 물 흐름처럼 떠나보내는 힘이 

바로 방하착입니다. 



방하착이란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 놓아라”,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는 뜻입니다.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데 

거기에 매달려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어느 인터넷에 실린 이야기인데 방하착에 대하여 잘 설명하고 있는 것 같아 여기에 잠시 실어봅니다.

 

한 스님이 탁발을 하러 길을 떠났는데, 산세가 험한 가파른 절벽 근처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절벽 아래서 “사람 살려!” 라는 절박한 소리가 실낱같이 들려왔습니다. 소리가 들려오는 절벽 밑을 내려다보니 어떤 사람이 실족을 했는지 절벽으로 굴러 떨어지면서 다행히 나뭇가지를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려 살려달라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이오?” 

 

라고, 스님이 물어보니 다급한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사실은 나는 앞을 못 보는 봉사올시다. 산 너머 마을로 양식을 얻으러 가던 중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졌는데, 다행히 이렇게 나뭇가지를 붙잡고 구사일생으로 살아 있으니 뉘신지 모르오나 어서 속히 나 좀 구해주십시오. 이제 힘이 빠져서 곧 죽을 지경이오!”

 

스님이 자세히 아래를 살펴보니 그 장님이 붙잡고 매달려 있는 나뭇가지는 땅 바닥에서 겨우 사람 키 하나 정도 위에 있었습니다. 뛰어 내려도 다치지 않을 정도의 위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스님이 장님에게 외쳤습니다.

 

“지금 잡고 있는 나뭇가지를 그냥 놓아 버리시오. 그러면 더 이상 힘 안들이고 편안해 질 수 있소!"

 

그러자, 절벽 밑에서 봉사가 애처롭게 애원했습니다.

 

“내가 지금 이 나뭇가지를 놓아버리면 천길 만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즉사할 것인데, 앞 못 보는 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어 제발 나 좀 살려주시오~”

라고 애걸복걸 했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봉사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살고 싶으면 당장 그 손을 놓으라고 계속 소리쳤습니다. 그런 와중에 힘이 빠진 봉사가 손을 놓자 땅 밑으로 툭 떨어지며 가볍게 엉덩방아를 찧었습니다. 잠시 정신을 차리고 몸을 가다듬은 장님은 졸지에 벌어졌던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파악하고 멋쩍어 하며 인사치례도 잊은 채 황급히 자리를 떠났습니다.



우리들의 과거에 대한 집착도 이와 같습니다. 

놓아버리면 살 것인데 놓지 못하고 

거기에 계속 매달려 힘들어합니다. 

 

지나버린 일들에 대하여 

분노하고, 

후회하고, 

아쉬워하면서 삽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고통 받습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포승줄로 묶고 

그리고 고통스러워합니다. 

 

누가 묶은 것이 아닙니다. 

생각 안 해도 될 것을 

스스로 생각해내고 고통 받습니다. 



놓아버리면 될 것인데 놓지를 못합니다. 

과거에 대한 집착 때문입니다. 

과거에 대한 집착 뿐 만아니라 

현재에 대한 삶도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에 

욕심을 부리며 나뭇가지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 장님처럼 놓지를 못하고 발버둥 칩니다. 



수많은 스승들과 선지자들은 

 

‘놓으라고, 놓는 것이 네가 실길’이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중생들은 놓지를 못하고 괴로움 당하고 있습니다.

 

우주는 인연법에 의해 생멸을 계속합니다. 지금 우리 눈에는 변화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조차도 즉 무생물조차도 지금 그 내부의 원자를 보면 이 순간에 변화하고 있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 우주 전체가 계속해서 살아 움직이고 있으며 흘러 흘러가고 있습니다. 멈춰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무주(無住)입니다. 

 

어디로 흘러가는지는 모르지만 머무름 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찰나찰나 그때그때의 인연을 만나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법(法)와 내(我)가 만나 시방세계에 흘러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인연이라고 생각한다면 

용서하지 못할 만큼의 괴로움도 없고, 

아픔도 없습니다. 

그저 그때의 인연이 안 좋았을 뿐이었습니다. 

 

그 안 좋은 인연도 흘러가면 그뿐 입니다. 냇물이 흘러가면서 바위라는 장애를 만나기도 하고, 낭떠러지에 떨어져 폭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냇물은 그저 흐를 뿐입니다. 바위를 만났다고 짜증내지 않으며 낭떠러지에 떨어지게 되었다고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저 흘러갈 뿐입니다.

 

그런 냇물처럼 우리들의 인연도 나쁜 인연, 좋은 인연을 만나면서 그렇게 흘러갈 뿐입니다. 어떤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안 좋은 인연을 만났구나.’ 생각하고, 좋은 일이 생겼으면 ‘아 좋은 인연을 만났구나.’ 라고 생각하고, 



그런데 ‘이 인연도 곧 가겠구나.’ 

생각하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그때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물 흐름에 턱 맡기고 살면 됩니다. 한마디로 마음을 턱 놓고 살자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은 영원한 것은 없고, 영원하기를 집착할 것도 없습니다. 집착한다고 해도 머물러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이 들면 아프고, 늙고, 보기 싫고, 그럽니다. 

아무리 당대의 최고의 미인도 나이 들면 당연히 아프고, 늙고, 보기 싫어집니다. 



모든 것을 세월의 흐름에 맡기고 

마음을 턱 놓고 살면 됩니다.

마음을 턱 놓고 산다는 것은 

그렇게 스스로 묶었던 포승줄을 풀고 자유롭게 살자는 것입니다. 

 

우리 머릿속에 그려진 아픔이나 기억, 고정관념, 욕심 집착에서 벗어나 그때그때 거기에 맞추어서 즐겁게 살자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방하착(放下着)입니다.

 

그런데 

내가 없고 법도 없으면 이런 인연도 없습니다. 

그 인연이라는 것도 사실은 말짱 헛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라고 생각하는 이 나(我)가 

실체가 없는 무수한 인연에 의해 만들어진 

무아(無我)인 것을 알고, 

 

법도 무수한 인연에 의해 만들어진 실체가 없는 빈 것이라는 것을 알면 그 인연이라는 것도 말짱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냇물이 흘러가도 흘러가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흐르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원망하는 마음도 없고, 미워하는 마음도 없고, 좋아하는 마음도 없는 것입니다. 아예 마음 자체가 텅 비어버린 무성(無性)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실은 방하착도 없습니다. 

모두다 착각이고, 

그림자이고, 

꿈일 뿐입니다. 

 

이 없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마음인데 

그 마음을 탁 깨우쳐서 

생활 속에서 그대로 행하는 것이 

진정한 방하착(放下着)입니다.

 

욕심은 자기 자신을 가두는 일입니다. 감옥을 아무리 황금으로 만들었다 해도 그곳에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물고기가 필요한 것은 물이듯 새에게 필요한 것은 창공을 마음 놓고 훨훨 날아다는 자유일 것입니다.

 

 

    흔들림 속에 고요함이 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