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추어 보는 것[見]’과
‘식심으로 보는 것[識見]에 대하여
본다 할 때 보이는 그대로를 비추어 보는 것[鑑覺].
즉 스스로 비추어 느껴지는 감각(鑑覺)을
’부처의 봄(佛見, 正見)’이라 한다고 했으며,
이것이 진정 있는 그대로를 바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으니, 누구나 태어날 때는 자성청정심의 맑고 순수하여 때묻지 않은 마음이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듣고, 보고, 맛을 알고, 느끼고, 사량하여 그것에 훈습되어져서 염법에 물들어 간다.
그 수많은 정보, 허상과 실상 즉, 지금 여기 이 앞에 펼쳐진 것과 스스로의 경험과 현실에 주하여 마음을 또 스스로 일으켜 공상, 망상, 허상 등의 상들이 다시 그 사람의 마음에 물들고 훈습되어 있다. 그 수많은 정보가 갈등을 빚어내어 현실과 많은 차이점이 생겨난다.
그래서 이 상[染法]과 현실이라는 두 상이 생겨나고 만들어져서 차별적 경계가 자리잡게 된 것이니, 이것을 일러 식심(識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사람의 의식구조가 이렇게 비교분석하고 그 차별상을 도출하여 사리분별을 따져서 보는 것이며, 이것을 일러 식심으로 본다[識見]라고 한다.
우리가 등산을 할 때 정상에 다 올라갈 즈음에는 몸에 있는 모든 힘들이 소진되고, 숨은 차고 오로지 앞의 땅만 보고 어떤 다른 생각 없이 오직 올라간다는 하나인 일심이 된다. 즉 이때가 바로 제8식으로 의식이 나누어지지 않고 오직 그냥 한 마음인 일심만이 독로하는 것이며, 내가 올라간다는 생각마저 사라진다.
그때가 무심한 경지이며 일심으로 해도 함이 없는 무의식의 경지가 되는 것이며, 모든 사량분별이 사라진다. 그렇게 정상에 도착하여 바위 위에 섰을 때. 바로 그 순간 앞에 보이던 모든 경계가 다 사라지고 눈앞에 저 끝간 데 없는 자연이 허공처럼 펼쳐진다.
이때 모든 사람이 아~~~! 아무런 생각이 없는 감동 그 자체가 현전한다. 모든 것을 벗어나고, 모든 경계가 경계가 아니고,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그 감성 하나만 존재한다. 어떤 세상사의 일들이 일시에 잊어버려, 오직 나도 없고, 자연도 없고, 그냥 펼쳐지는 이 아름다운 풍광이 한없이 즐겁고 환희로워 한참을 멍하게 그렇게 서있다. 이것이 아무런 분별이나 차별이나 세속심을 섞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상과 내가 하나가 되고,
그 어떤 근심과 걱정도 다 사라진 환희로운 어떤 상태만이 한참 동안 지속된다. 이런 경지가 우리가 말하는 깨달음의 세계이고, 무심의 경지이며 공심(空心)이어서, 일체의 차별상이 사라진 오롯이 한 마음만 독로하는 해탈의 경지인 것이다.
그러다 이내 다시 경계를 살피게 되고, 돌과 나무와 능선을 따라 눈이 움직이고, 산 아래 풍경들이 하나 둘 나타나고 그렇게 둘러보고 살펴보니 그 감동과 환희심에서 벗어나 다시 중생심인 식심이 돌아와 좋다느니, 아름답다느니, 환희롭다느니… 하면서 다시 차별상을 도출하여 중생심으로 돌아가 버린다.
이것이 바로 여기서 이야기 하는 식심의 경계이다.
그래서 처음 펼쳐진 그 허공인지 경계인지 그 어떤 마음도 없이 확 펼쳐진, 있는 그대로의 경지를 일러 바로 보는 것이며 환희로운 경지이며 차별상이 사라진 무심의 경지이며, 부처의 경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보는 것이 둘이 아니다.
이때 보는 것이 둘이 아님이 바로 처음 말한 ‘있는 그대로 비추어 스스로 깨달음(鑑覺)’이 되는 것이며, 이때 차별상이 없으므로 다시 사량이나 의심을 하지 않게 된다.
그러니 거기에는 식심으로 보는 것이 없이,
있는 그대로의 진상을 볼 수 있으니,
정견(正見)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정견이 이루어지면 비추이는 상을 그냥 보느냐, 이것을 다시 사량해 차별상으로 보느냐 할 것이 아니니, 보는 것으로 다시 보는 차별상이나 분별심이 없음으로
“이제 보는 것이 둘이 아니라면
보는 것으로 볼 것을 보지 않는다”
라고 하셨다. 스스로 ‘비추어 깨달음’ 자체를 다시 식심으로 보지 않음으로 “보는 것으로 볼 것을 보지 않는다” 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차별상으로 보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우리의 식심이 그렇게 물들어 염심이 되어 있어, 그렇게 되어 지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오직 스스로 그렇게 되게끔 수행하고 마음에 습을 걷어 내어, 허망한 식심을 없애 나가는 방법밖에는 없다. 이러함으로 스님도
“만일 보는 것을 다시 본다면 앞에 보는 것이 보는 것이냐, 뒤에 보는 것이 보는 것이겠냐” 라고 되묻고 계신다.
즉 스스로 ‘비추어 깨달음’이 보는 것이냐 식심으로 차별상을 도출하여 보는 것이 보는 것이냐 묻고 계신다. “마치 볼 것을 볼 때엔 보는 것이 아니며” 라고 하시어 비추어 보이는 상을 다시 사량분별하여 차별상을 도출하여 본다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보는 것은 오히려 보는 것을 떠나
보는 것이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 것과도 같다.
보는 것을 다시 사량분별하여 차별상으로 보는 것은 그 보이는 상을 떠나 보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며, 그래도 그것은 진정으로 보는 것이 아님으로 미치지 못한다고 하시어서, 사량분별심으로 보지 말라고 설명하고 계신 부문이다.
이제 나아가 듣고, 향기 맡고, 맛을 알고, 몸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이면 되는 것이지 식심으로 다시 듣고 보고 하여 그것으로 판단하고 의식한다면 이것은 전부 다 알음알이이며 차별상이며 분별심인 것이라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법을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실행되지 않으면 모든 부처님께서 빨리 기약을 주신다[授記]고 하였다.
법을 보고 듣고 느끼는 오온 육식이 실행되지 않으면, 빨리 기약을 주신다는 것은 식심으로 헤아리는 사량분별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를 인증하고 차별과 분별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그대로 부처의 경지이며 부처의 마음임으로 부처님이 별도로 기약을 주시지 않아도 이미 부처가 되어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 대목은 참으로 중요한 부문이다.
우리의 식심을 여덟 가지로 나누어 설하지만,
본마음은 일심이라 하여 이것이 한 마음[一心]이며,
마음은 둘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일심이라고 해도 그 모양이나 형상이 없음으로 이것을 일러 무심(無心)이라고 하는 것이지 마음이 없어 무심이라고 하는 것이 아님도 알아야 한다. 또 그 형상이 허공과 같음으로 허공이다, 공(空)이다 하는 것이니 이 또한 같은 이치이다. 그러니 오직 마음이란 경계를 의지하여, 그 형상을 나투이는 것임으로 그 경계가 바로 마음이 되는 것이다.
백장록 강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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