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는 닦는 것이 아니다
마조 선사가 말하였다.
“도란 닦는 것에 속해 있지 않다. 만약 닦아서 이루는 것이라면 닦아서 이룬 뒤에 다시 파괴된다. 곧 성문들의 법과 같다. 만약 닦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 곧 범부와 같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견해를 지어야 도를 통달할 수 있습니까?”
“자신의 성품에 본래 갖추고 있으니 선과 악에 막히지 아니하면 도를 닦는다고 말할 수 있다.”
馬祖曰
道不屬修 若言修成 修成 還壞 卽同聲聞 若言不修 卽同凡夫 問 作何見解 卽得達道 師曰自性 本來具足 但於善惡上 不滯 喚作修道.
강 설
도란 무엇인가?
도란 인생 최고의 가치다.
인생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에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고 하였다.
朝聞道 夕死可矣
그와 같은 인생 최고의 가치를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겠는가? 흔히 오랜 세월 동안 수행을 하고 고행을 해야 비로소 얻어진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마조 선사의 밝은 안목으로 말씀하신 내용은
도는 그와 같이 닦아서 얻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닦아서 얻은 것은 결국은 파괴되기 마련이어서
진실한 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 최고의 가치인
이 도는 어디서 얻은 것이 아니라
본래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알지 못할 뿐이다.
6조 혜능 스님은 5조 홍인 스님에게 『금강경』의 가르침을 듣고는 본래로 자신이 지니고 있는 도를 깨달았다. 도를 깨닫고는 그 도에 대한 내용을 이렇게 말하였다.
자성은 본래 청정하거늘
무엇을 더 바랍니까?
자성은 본래부터 생멸이 없거늘
무엇을 더 바랍니까?
자성은 본래부터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거늘
무엇을 더 바랍니까?
자성은 본래 아무런 동요가 없거늘
무엇을 더 바랍니까?
자성은 능히 일체 만법을 만들어 내거늘
무엇을 더 바랍니까?
何期自性本自淸淨
何期自性本不生滅
何期自性本自具足
何期自性本無動搖
何期自性能生萬法
『직지』의 본문에도
“자신의 성품에 모든 것을 본래 갖추고 있다.”
라고 하였다.
이처럼 사람마다 본래부터 이미 다 갖추고 있는 것이
곧 인생 최고의 가치인 도(道)이다.
시비와 선악에도 관계되지 않는다.
도를 시비와 선악에 관련하여 이해하려고 하면
그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시’는 ‘도’고 ‘비’는 ‘도’가 아니라 하고,
‘선’은 ‘도’고 ‘악’은 ‘도’가 아니라 하면
그와 같은 견해는 도를 꿈에도 보지 못한 사람이다.
『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에 이르기를,
“탐욕이 곧 도요, 성내고 어리석음도 역시 그러하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법
가운데 일체의 불법이 모두 갖추었다”라고 하였다.
貪慾卽是道 瞋恚亦復然 如是三法中 具一切佛法
불교를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최상승의 견해에 눈을 떠야 할 것이다. 본문에서 말했듯이 자신의 성품 안에 모두 갖추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일체의 선악 시비도 자신의 성품에서 나온다.
우리들의 자성은 그와 같이 위대한 존재이다. 만약 선만 행할 줄 알고 악을 행할 줄 모르거나 옳은 것만 행할 줄 알고 그른 것은 행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불완전한 자성일 것이다. 그와 같은 자성은 도라 할 수 없다.
사람의 자성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할 수 있는 그 사실과 능력이
곧 자성의 위대한 점이며, 그것을 일러 도라 한다.
결코, 어떤 한 사회가 정의한 도덕적 견해로써
도를 운위해서는 도는 꿈에도 볼 수 없으리라.
직지 강설(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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