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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모두가 보살, 모두가 붓다

모두가 보살이며 모두가 붓다


붓다는 빛 가운데에는 어둠이 없다고 말했다.

     

자기를 잊어버린 것이 어둠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자기가 아닌 것에 몰구하느라 자기를 잊어버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수행이란 나는 몸과 마음을 가진 한 개인이 아니라 순수한 의식이며 존재 그 자체라는 사실을 자신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일이다.

     

종교란 무엇때문에 존재하는 것일까?

     

대체 무엇때문에 이 지구상의 수억명이 넘는 사람들이 매주 교회나 사찰 또는 모스크를 찿아가 간절히 기도하는가? 사랑과 자비를 설법하고 있는 종교들이 벌리는 처절한 전쟁은 또 무엇인가? 종교간의 갈등과 반목은 결코 치유될 수 없는 것인가?

     

우리가 우리의 주체라고 인식하고 있는 

몸과 마음의 공성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존재는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태어나 

자신의 의지와는 정반대로 

사라지도록 조건지어져 있는 사건이나 현상일 뿐이라는 

진실을 마주보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하여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돈과 명예와 권력 등을 손에 쥐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으로 문제의 본질이 풀리는 것도 아니다. 삶 속에서 마주치게 되는 거의 모든 문제는 그 해답이 어딘가 따로 있어서 풀리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인간이 성숙해지면서 그 문제가 더 이상 문제로 남지 않을 때 비로서 풀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믿음과 수행을 통하여 나를 찾아가는 일이다. 내면의 성찰을 통하여 내가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행위인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비로서 무엇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며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상태에서는 그 무엇을 하더라도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조차 판단할 수가 없게 된다.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내가 누구인지는 잘 알고 있지 못하는 이 난감한 상황에서 벗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창조주인 절대신을 믿고 따르는 종교와 달리 자력 수행을 통하여 순수한 의식과 하나가 된 붓다는 우리가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인식하는 이 세계는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이라는 필름을 통하여 창조하는 주관적이고 사적인 것이며 신이란 이 세계를 현출하는 의식의 총합이라고 말한다.

     

이 세계는 이 세계를 인식하고 있는 인간이라는 인식의 주체와 깊은 연관이 있다. 이 세계가 그것을 인식하는 각자의 방식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세계는 모든 존재에게 공통적인 세계가 아니라 각자의 감정과 관념이 지배하는 각자의 사적인 세계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갈등과 투쟁의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그 사적인 세계란 욕망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가진 권력과 돈 그리고 가치의 우열이 지배하는 곳이므로 사랑은 희미해져가고 이기심이 독재하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파도와 같은 것이다.

     

나라는 생각은 몸을 나의 주체로 받아들이는 관념으로부터 출발한다. 이 관념을 바탕으로하여 일어나는 생각들이 마음을 구성하는 것이므로 생각들의 묶음이 마음이고 마음이 영혼이며 이것이 한 사람의 바탕이 된다.

     

 

몸과 마음의 움직임 속에는 

그 행위나 움직임을 하고 있는 개체로서의 내가 있다는 

가정이나 관념이 숨어있다. 

하지만 이것은 실체가 아닌 관념에 불과한 것이므로 

삶의 구속에서 벗어나려면 

몸과 마음을 나의 주체로 인식하는 생각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우쳐야한다. 

나라는 개체의식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그 생각을 일으키는 주체가 나라고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하리쉬는 마음이라고 일컬어지는 개체의식과 참나라고 불리우는 순수한 의식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마음이 내면을 향하면 그것이 순수한 의식이고 마음이 외부로 향하면 개체의식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

     

천지를 울리는 자각이다.

     

중생이 곧 붓다라는 깨우침이다. 

중생(개체의식, bodhisattava)과 붓다佛(순수의식. Buddah)의 일원성을 강조하고 있는 이 말씀은 심경이 설법하고 있는 반야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수행이란 개체의식이 순수의식을 찾는 것이므로 

결국 찾는 자가 찾는 행위이며 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두가 보살이며 모두가 붓다인 것이다.

   

     

      나는 일체요,

      절대적 존재이며,

      상대적 개념의 부재입니다.

      이것의 드러남이 의식이며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입니다.

     

       -니사르 가닷타 마하라지-

 

 

    시詩,반야심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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