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혹은
우주의 비밀
반야심경에서
“모든 법은 공하여 생겨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고,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라고 했다.
화자가 갑자기 ‘오온’에서 불쑥 뛰쳐나와 십팔계를 넘어 광활한 우주로 나아갔다. 십팔계를 넘으면 진실한 모습이 펼쳐지고 신비로운 우주가 나타난다.
“생겨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고,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 “오온은 모두 공이다”라는 말이 인간 자신의 관점에서 오온의 공성을 발견한 것이라면, “공 가운데 오온이 없다”는 말은 우주적인 차원에서 오온의 공성을 발견한 것이다.
어떻게 생겨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을 수가 있을까?
생겨남과 사라짐은
모든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며 인간이 시간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다. 가장 흔한 것은 생사다. 한 사람이 태어나면 자기도 모르게 자랐다가 다시 늙고 결국에는 죽는다. 무슨 일이든 시작되면 언젠가는 끝이 난다. 꽃이 피면 반드시 시들고 새 옷도 언젠가는 헌옷이 된다.
사람이 어리석으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흐름을 거부하고 오로지 ‘생겨남’에만 집착하고 ‘사라짐’을 거부한다. 가장 흔한 것은 죽음 앞에서 죽기를 거부하며 자신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믿거나,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연애를 할 때 그 사랑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집착하기도 한다. 일단 만나면 헤어지지 않으려 한다.
이런 예는 수없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사라진다는 것을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헛된 꿈속에 살면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잡으려고 애를 쓴다. 사실 우리는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붙잡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무언가를 붙잡으려고 하면 무한한 번뇌에 빠질 뿐이다.
‘사라짐’만을 보고 ‘사라짐’에 집착하는 비관주의자들도 있다. 그들은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사라짐’만을 보기 때문에 그들은 ‘생겨남’의 의의를 완전히 부정해 버린다. 어차피 죽을 걸 살아서 무엇 하느냐, 어차피 잃게 될 걸 얻어서 무엇 하느냐는 논리다.
그런가 하면, ‘생겨남’과 ‘사라짐’을 모두 인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생겨남’의 환희 때문에 ‘사라짐’을 잊지 않고, 또 ‘사라짐’의 우울함 때문에 ‘생겨남’의 환희를 잊지 않는다. 그들은 생멸이 모두 있어야 온전한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렇게 심오한 깨달음은
관점의 전환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주의 관점,
무한성의 관점에서 이 세계를 바라본 결과다.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사라지든
그저 에너지의 전환일 뿐이다.
사실 생겨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다. 우리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물론 생사가 있다. 가족이 사망했을 때 우리는 몹시 슬퍼한다. 하지만 인류 전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개인이 죽어도 인류는 여전히 건재하다. 또 인류라는 물종이 사라져도 지구는 건재하다. 지구라는 행성도 언젠가는 사라지지만, 그래도 은하계는 존재한다. 은하계 역시 언젠가는 사라지겠지만 우주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고, 우주도 언젠가는 사라지겠지만
허공은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의 관점에서 볼 때는
생겨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는 것이다.
단지 인류가 이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허공에 살면서 자기 세계에만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수많은 생멸 현상이 있다고 착각할 뿐이다.
평생 걱정 없이 사는 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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