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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번뇌망상 그대로가 보리

번뇌망상 그대로가 보리



화두를 깨치면 바로 부처님 자리(佛位)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대나무가 봄이 되면 죽순이 나오는데 큰 것은 팔뚝만 합니다. 

어느 효자가 어머니가 겨울에 죽순이 먹고 싶다고 하니까 대밭에 매일 가서, 죽순 나오라고 빌었답니다. 그 추운 겨울에 죽순이 쑥 나와서 해드렸다고 합니다. 

일체가 모두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대나무의 죽순이 쑥 올라온 것이나 대나무가 굵어져서 있는 것이나, 대나무는 대나무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부처님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돈오라는 것이 참 중요한 것입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어떤 것입니까?” 

하니 조주 스님 같은 분은 
“뜰 앞에 잣나무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뜰 앞에 잣나무라는 것을 척 하니 알아들으면 됩니다. 

그런데 용아 스님이 취미 화상한테 가서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나 한번 일러주시오.” 했더니 

취미 화상이 깔고 앉는 선판(판자로 짜서 앉아서 참선하는 것)을 

가지고 내리쳤습니다. 

용아 스님이 
“스님이 때리긴 때렸지만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일러주지는 못했습니다.”라고 말하니까, 

“너는 나와 인연이 없으니 가라.”라고 했습니다.

다시 임제 선사한테 갔습니다. 

임제 스님은 누구나 오면 할을 했는데, 

할 한 번 하면 그 누구든지 할 하는 그 말에 깨닫게 된다고 했습니다. 

임제 스님한테 가서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일러주시오.” 

하니까 임제 스님이 하는 말이 
“네가 깔고 있는 방석을 가져오너라.” 

가져가니까 임제 스님이 그것을 가지고 후려쳤단 말입니다.

“스님도 날 때리긴 때렸지만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정말로 근기가 익었다면 단박에 해결이 됩니다. 

그런데 해결이 안 되는 것은 모든 사람이 평소에 항상 밥 먹고 옷 입고 하는 중에 
“너, 잠잤나?” “잠잤다.” 
“밥 먹었나?” “밥 먹었다.” 

모든 그대로가 
“뜰 앞에 잣나무”라 하는 소리나 
“선판을 가져오너라.” 
“방석 가져오너라.” 하는 것과 별 다를 것이 있느냐 하면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거기서 
바로 보고 깨닫느냐 못 깨닫느냐가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서 엉뚱한 생각을 해서 그렇지 

바로 깨닫기만 하면 됩니다.

마음이 공한 자리가 중생과 부처가 다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나 부처님이나 공한 그 자리는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사상이 
몰록 끊어지고 망념 일체가 몰록 쉬어져서 제해졌다면 
필경에 공적한 그 자리가 부처와 우리가 다르겠습니까? 
똑같습니다. 그래서 

‘범부요 곧 성인(卽凡卽聖)’이라고 합니다.

이 생의 이 몸을 버리고 다음 생에 공부한다느니, 

이 몸을 버리고 마음이나 성품이 따로 있어서 

그걸 깨닫는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돈오를 닦는 사람(修頓悟者)은 이 몸을 여의지 않고 

욕계, 색계, 무색계 삼계三界를 뛰어납니다.

세간을 무너뜨려 없애치우고 세간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간을 무너뜨리지 않고 
세간을 벗어나고, 번뇌를 버리지 않고 
열반에 들어간다


不壞世間而超世間 不捨煩惱而入涅槃


여러분은 
번뇌망상을 끊어서 없애고 보리를 구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망상을 없애려고 하는 것은 
마치 큰 돌을 잔디밭에 놓으면 잔디가 바위에 눌려 위로는 올라오지 못하니까 바위 옆으로 삐져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망상을 안 일으키려고 하지 말고, 

망상을 끊으려고도 애쓰지 말라는 소리입니다. 

단지 “무엇인고?” 하는 화두의정만 잡들여 나가면 

자동으로 순화되어 갑니다. 망상번뇌가 스스로 쉬어져서 없어집니다. 

망상번뇌가 나중에 알고 보니까 보리입니다. 

망상을 제하고 우리가 깨달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이 몸을 버리고 깨달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이 세간을 무너뜨리고 세간을 뛰어나는 것도 아니고, 

번뇌를 버리고 열반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돈오를 닦지 않는 사람은 들의 여우(野狐)에 비유합니다. 

여우 그놈이 앞만 보고 가면 되는데, 

사람이 따라가면 한 열 발자국 가다가 

힐끔 힐끔 뒤를 돌아보고 앉아 있다가 사람이 따라가면 또 도망갑니다. 

여우가 의심이 많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사자가 되어야지 여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돈오를 닦는 자는 사자고, 돈오를 닦지 않는 자는 여우라는 것인데, 

여우가 사자를 아무리 따라간다고 해도 여우가 사자로 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들에 있는 여우가 사자를 쫓아간다고 해도 사자가 되지는 못합니다.


“진여의 성품은 실로 공空한 것입니까? 
 실로 공하지 않는 것(不空)입니까? 


만약 공하지 않다고 말하면 
곧 이것은 상相이 있는 것이며, 
만약 공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곧 단멸斷滅이니 

일체의 중생이 마땅히 무엇을 의지하여 닦아야 해탈을 얻겠습니까?” 

하고 다시 묻는 데 대해 

“진여의 성품은 공이면서 또한 공이 아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진여의 묘체는 모양도 없고, 또한 상이 없어서 가히 얻지 못하니, 

이를 일러 공이라고 한다. 

그러나 공해서 모양이 없는 체 가운데 항하사의 용用을 만족하게 갖추어서 
곧 일에 응하지 아니하는 것이 없으므로 
이를 이름하여 또한 불공不空이라고 한다.”라고 답합니다.

‘일체가 모두 공했다’고 할 때, 

이 몸을 없애고 공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 몸 이대로 공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품 자체도 공이라, 

공이라는 것은 모양이 없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아주 없는 것으로 끊어졌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거기서는 무한한 묘용을 굴립니다. 
쓸 때에 만 가지 것이 다 거기서 나오게 되고, 

나오게 될 때는 불공이라고 합니다.

오리나 닭이 걸어 다니는데 사람이 잡으려고 쫓아가면, 급하면 날아갑니다. 

오리나 닭이 걸어간다고 해서 영원히 걸어간다고 단정적으로 말을 못하고, 

날아간다고 해서 나는 물건이라고 단정적으로 말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걸어가지만 날아가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몸뚱이 그대로 가지고 있지만 
이 몸뚱이가 이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몸뚱이에 공한 진여자성 자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걸어 다닌다고 해서 영원히 걸어 다닌다고 할 수도 없고, 

날아다닌다고 영원히 날아다닌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걸어 다닐 때에 날아다니는 성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저것은 날아가는 것도 아니요, 

걸어가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그러면 날아가는 것도 아니요, 걸어가는 것도 아닌 저것은 뭐냐?

어떤 분의 강의를 들어보면 그것은 바로 중도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자칫 잘못하여 두 가지를 배제한 가운데 중도를 내세우면 

이것도 하나의 큰 허물이 됩니다. 

중도라고 하는 규정을 세워 놓으면 그것은 허물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중도라는 것은 중도라는 성격이 별도로 만들어져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걸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걸어간다 할 때 
걸어가는 그것이 바로 중도이며 
날아가면 날아가는 것 자체가 중도입니다. 



이것저것 배제하고 걸어가는 것도 날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 그것은 중도라고 말해야지 하면, 

그것도 큰 허물을 짊어지게 되므로 그것은 아닙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닐 때는 뭐라고 합니까?

여기서 중도라고 하면 방망이를 맞습니다. 

역대 부처님이 중도라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단지 부처님이 팔정도나 12인연법을 설한 속에, 

중도라는 말이 드러내서 규정짓지 아니하는 속에 은연중 내포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이 때에 따라서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말하면서 

그 모든 것을 판가름해 나갈 때, 중中이라고 하는 것을 풍겼을 뿐이지 

그러면서도 또한 중이 아니라고 발을 쑥 뺐습니다. 

그러면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중도도 아니다.

“그러면 뭐냐?”

함허 스님 서문에 

“천지를 덮고 천지를 만들어내고, 

이 세상에 빠르기로 하면 더 빠를 것이 없고 더 견줄 것이 없다.” 

그러면 이것이 있는 것이요, 공한 것이요? 하니까 

“나는 알지 못한다.” 그랬습니다. 

중도다, 대답하면 될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제대로 안 사람이기 때문에 한 소리입니다. 
제대로 알아봤기 때문에 그 소리를 하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 그런 소리를 못합니다.

달마 스님이 양무제를 만났을 때 나를 대하는 자는 누구인가? 

하니까 ‘불식不識입니다. 
나는 알지 못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나는 중도입니다’ 하면 될 것인데, 
그 중도라는 말을 절대 하면 안 됩니다. 

『금강경』에 중도라는 말이 어디 있습니까?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일 뿐이니라, 

여기서 부처님의 확실한 의지를 간파해서 알아버리면 그 사람은 좋습니다. 
술과 고기 먹고 안 먹고, 그런 것을 따지고 계행을 따지고 할 자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말로만 듣지 공부를 제대로 안 하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육조단경』에서 육조 스님도 
“알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요사이 책깨나 보고 뭘 물으면 
“모릅니다.” 
“알지 못합니다.” 하고 대답을 하는데, 

그런 사람이 
“알지 못합니다.” 하고 대답하는 그 소리하고 

달마 스님이 “알지 못합니다.” 하고 대답한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말로 배우고 말로 익혀 알음알이로 조금 알아서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중도도 아니다. 

뭐냐?” 할 때 “불식입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제대로 대답을 한 것이냐? 그건 아닙니다. 

이 문제는 
확실하게 자신이 공부를 해서 알아야 됩니다. 

유구무언입니다. 

본인이 체험을 해서 확실히 알면, 

역대 조사스님이 한 말을 확실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대주선사어록 강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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